못생긴 모과 속
지나가다 가계 앞에 떨이처럼 내놓은 모과가 눈에 들어와 차라도 담아볼 요량으로 만원을 주고 사 왔다. 흐르는 물에 베이킹소다로 박박 문질러 닦아 말려놨다 채를 썰려고 자르려니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싼 게 비지떡인가 왜 이리 못생기고 딱딱하담? 3개만 겨우 채 썰고 손목이 아파 나머지 4개는 접시 위에 담아 식탁 위에 두었다. 오가다 보니 비록 못생긴 노오란 모과일지라고 주방과 제법 잘 어울리며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하루가 지나고 유리병에 담가둔 모과차가 어떻게 됐는지 열어봤더니 꿀과 설탕에 잘 절여져 차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다더니 큰 스푼으로 서너 번 퍼 주전자에 물과 함께 넣어 가스 불 위에 올려놨다.
요 며칠 가을처럼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지난 주말 눈이 내린 뒤부터는 시베리아 한파가 찾아온 듯 춥다.
몇 분이 지났을까 주전자에서 모과차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정겹게 들린다. 불을 제일 작게 해 깊은 맛이 나오도록 기다리는데 모과 향이 집안 가득 퍼져나간다. 투명한 유리잔에 차를 따르고 기침을 자주 하는 남편에게 내놓았다.
'이건 손수 만든 수제 모과차야.' 차 한잔에 생색까지 한 것 내본다. 2023년이 며칠 남지 않은 추운 날, 우리는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올해를 보내는 중이다. 별건 아니지만 소소한 기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내가 다녔던 시청 앞마당에도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다. 운 좋은 해에는 모과를 주어 책상 위에 놓고 일하며 모과 향을 즐기곤 했는데 올해도 모과가 열렸으려나? 직원들은 업무 마무리와 내년도 준비에 바쁘겠지? 차 한잔 하며 옛날 생각을 싱겁게 해 본다.
직장인의 가장 흔한 착각이 '나 없으면 안 돌아간다'라던데, 지난 1년 별일 없이 잘 돌아가는 걸 보며 이젠 자아도취와 망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삶의 볼륨과 화질
돌이켜보니 퇴직 전에는 원 없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게 꿈이었는데 퇴직하니 뭘 좋아하는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막상 좋아하다가도 싫증이 나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좋아하는 것이 바뀌기도 하고 이게 진짜 좋아하는 일인지 의구심이 날 때도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퇴직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나 보다. 퇴직 준비를 안 한 대가로 올해는 그냥 마음 내키는 것을 이것저것 다 해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지난 1월에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고 시작한 것이 글 쓰기였다. 보고서 외에는 글을 써본 경험이 없어 막막하고 어려웠지만 글을 쓰다 보니 치유와 위로를 받는 순간이 꽤나 많았다. 글을 쓰며 무심히 지나치던 감정도 내밀하게 들여다보며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연습도 해 보게 된다. 지난 삶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휘발되는 소중한 순간을 잡아두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어쩜 나도 겉은 모과처럼 울퉁불퉁 못생겼어도 안은 향기가 가득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과차를 만들기 위해 숙성의 시간이 지나야 그 향기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글로 숙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글 쓰기를 통해 삶의 볼륨과 화질을 높여 퇴직 후 인생을 두 배로 풍부하게 살아가 보련다.
조금이라도 일찍 인생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된 것은 퇴직으로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어렴풋이 알아가며 살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얻은 게 참 많은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