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보다 매운 공직살이

by 이소희

고추보다 매운 공직살이



벌떡 일어나 '퇴근하겠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중년의 과장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벌써 가려고.'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자리 뜬 직원 없이 사무실 안은 고요했다.

직원들은 눈동자만 움직여 일제히 이 상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다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 말이

아. 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나왔으나 기분이 영 찜찜했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 찍혔구나.'


군기 심하기로 소문난 A 부서로 이동한 첫날, 종일 전임자에게 업무를 배우고 녹초가 되었다.

퇴근 한 번에 하늘 같은 선배를 뒤로하고 나온 싹수 노란 직원이 되었다.


그 눈치 없는 직원은 바로 나였다.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지만 불과 10여 년 전 흔한 사무실 풍경이다.

퇴근하겠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눈치만 봐야 하던 시절, 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매일 밤 10시가 넘어야 별을 보며 사무실을 나왔다.

우스갯소리로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퇴근했다.


그 시절 나는 타인의 시선만 의식하느라 늘 피곤했다.

여름휴가 3~4일 다녀오고 평생 보건휴가 한번 못 쓰고 퇴직했으니 참 바보가 따로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이 특별히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공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본인도 열심히 일하는 상사였고 배울 점도 많은 사람이었으니 모두가 그러고 살았던 시절이었을 뿐이다.



일만 했는데 꼰대라니?


시간이 흘러 한 부서를 책임지는 과장이 되었다.

승진하고 친한 직원이 임홍택 작가의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선물해 줬다.

더 이상 직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니 주의하라는 애정 어린 당부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조심 또 조심하자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몇 년 전부터 잊을만하면 갑질 신고가 발생했고 재밌는 가십거리로 치부하며 언론에서 퍼 나르기 바빴다.

그래 터질 게 터진 게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은 우려가 되었다.

과장이 되니 챙길 일과 책임질 일도 많아 부담감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환경은 급변했다.

오후 늦게 오더가 떨어지면 퇴근하려는 직원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직접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동료 과장들이랑 차 한잔하면 다들 요즘 일하기 힘들다며 넋두리를 쏟아낸다.

'6시가 됐으니, 오늘은 칼퇴들 하세요.'라고 동료 과장이 말했더니

'원래 퇴근 6시에 하는 거 아닌가요?'

들어온 지 한 달 된 새내기한테 30년 선배인 본인이 한 방 먹혔다며 속상함 반 분함 반으로 씩씩거렸다.

휴가 신청을 해도 두말하지 않고 결재해야지 이유라도 묻는다면 밉상 꼰대나 갑질 과장이 된다며 정보를 공유하며 웃었다.


자기만 중시하는 젊은 직원이 이기적인지?

일을 열심히 하는 기존 세대가 꼰대인지?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세대 간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저녁 회식 문화도 사라지고 업무 외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다 보니 사무적 관계로 더욱 서먹서먹해진다.



세대 간 문제가 아니라고


미안한 표정 지으며 퇴근 연기 없는 직장생활은 환영할 일이다.

집에 가고 싶은 건 과장도 직원도 마찬가지다.

집에 가기 싫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밀려오는 일거리 때문에 갈 수 없는 입장인 거다.


트렌드 2024에서 우리는 분초 사회, 돈보다는 시간이 중요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퇴직하 유일하게 가는 곳은 집 앞 도서관, 전시 보러 가는 미술관, 주민자치센터 정도이다.

수많은 부서가 있지만 시민들이 접하는 부서는 사실 몇 개 안 된다.

그렇다고 모두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행태를 알아차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조직과 직무를 이용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정비하고 중첩되고 비효율적인 일은 없애야 한다.

보여주기식 전시행정과 관행적 업무로 낭비되는 인력이나 조직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젊은 친구도 기성세대도 공무원 생활이 힘들다고 한다.

공직문화를 세대 간 문제로 보면 답이 안 보인다.

훌륭한 인재들을 공조직에서 더 이상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즐거운 일터가 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늦은 시간, 집으로 가는 길. 혼자 퇴직을 결심하고 다음 날 무너뜨리기를 수백 번 하다 결국 지쳐 공직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오늘 첫눈이 왔다.

눈이 와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공무원 시절,

따듯한 차를 마시면 거실 밖 풍경화를 마음껏 즐겨 가면서도 나의 동료들은 오늘도 비상근무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퇴근 시간 전에 눈이 그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