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를 보고, 40분쯤 거뜬히 통화하는 나
모처럼 시청 근처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다.
오랜만에 사람들 많은 곳에 나오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고 몸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출근을 한 것도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도심에서 빠른 걸음을 걷는다. 나도 저들처럼 바삐 움직이는 군중 속 하나의 점처럼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무원 시작 당시, 나의 첫 업무는 호적 등초본 발급이었다.
지금이야 키보드 몇 번만 누르면 등본이 나오지만, 그때는 서고에 들어가서 가나다 색인으로 배열된 검고 두꺼운 책을 찾아 복사하던 시대였다. 호적서고를 들락거리며 무거운 책을 들고 수백 통의 등본을 복사하면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청 기획 부서로 발령이 났다.
어렵게 얻은 기회라 의욕만 앞선 첫날, 말씀자료를 써야 했다.
진땀을 흘리며 전임자가 쓴 것을 보고 작성해 조심스럽게 팀장 자리에 놓았다.
30여 분이 지난 후 팀장은 선임한테 '시간이 없으니 말씀자료 좀 다시 써.' 한숨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등줄기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고 말씀자료는 그렇게 내 손을 떠나 버렸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그날의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사설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필사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글을 쓰는 기획이나 홍보파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 혹은 주말에도 일을 했지만 뭔가 인정받는다는 기분에 피곤한 줄 몰랐다. 시간을 투입해 나아지는 게 보이니 뭐든 최선을 다했고 최고가 되고 싶었다.
팀 회식이 있던 어느 날, 평소 얼굴만 알고 지내던 p 과장이 술에 취해 우리 일행과 합석하게 되었다.
그는 내 자리로 건너와 앉더니 술을 한잔 따라 주며 말을 건넸다. '일 잘한다는 이야기 들었어.'
'아이고 잘하긴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도와주세요.' 그의 칭찬이 싫지 않았다.
빈말이 오가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그는 취기가 올라왔는지 나에게 충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거 일중독 아니야? 여자가 독하다 독해. 난 너무 잘난 사람들이 싫어.'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처음 말은 섞은 사이에 '일중독'이니 '여자'라니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일중독이라는 뼈 때리는 이야기에 한동안 반감이 컸고 그 후 그를 볼 때마다 그날의 일이 생각이 났다.
굳이 변명해 보면, 일을 하기 위한 직장에서 일은 기본이며 기본도 못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직에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간다는 자만심도 조금은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착각 속에서 퇴직하고 나 없는 조직이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다가 일중독에 걸려 미친 사람이 되는 줄도 모르고 그리 살았나 싶다.
이제 더는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은 빼고, 잘하려 애쓰며 살지 않으려 한다.
내 몸의 상태가 알려주는 알람 시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 움직인다.
점심 먹고 졸음이 쏟아져 내리면 편하게 한숨 자는 여유도 부린다.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달리기만 한 나,
매사에 성심을 다한 것에 후회는 없지만 왠지 모를 허망함은 떨쳐낼 수가 없다.
중학교 때 읽었던 '제인 에어'를 오늘은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봤다.
가정교사로 들어간 제인이 주인 로체스터에게 신분과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을 느끼는 장면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전율을 느꼈다.
그동안 영화 한 편 마음 편히 보지 못했고 로맨스보다는 업무 관련 실용 책들만 읽고 살았다.
그런 나에게 사춘기 때 제인 에어를 읽고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도 느껴지다니 놀랍다.
영화가 끝나고 뜨거운 커피를 내려 마시려던 차에 오랜만에 친한 언니가 전화를 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커피를 마시려고 보니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벌써 커피가 식었나 싶어 휴대전화를 보니 통화기록이 무려 40분이다.
나도 긴 시간 수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드는 아줌마라는 것에 픽 웃음이 나왔다.
일에만 관심이 있던 내가 이제 그 관심의 대상을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돌렸다.
가끔 금단현상이 있지만 일중독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중이다.
낡은 종이상자에 보관한 색 바랜 편지를 꺼내 읽듯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나의 젊은 날을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