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시간
어린 시절 시간은 참 천천히 흘렀던 것 같다.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학교 끝나고 가방만 집에다 던져 놓고 밖에서 재밌게 보냈던 시절의 시간은 충분하고 길었다. 그 시절 학교 가서 공부하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으나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시간은 더디게 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원했던 어른이 되었으나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결혼을 준비해야 했고, 결혼을 하고도 집을 사야 하는 끊임없는 삶의 쳇바퀴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바빴다. 삶은 늘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고단하게 살아 내야 했다.
퇴직해서야 부족했던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24시간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었는데 가족이 출근한 집에 혼자 남아 있으면 땡땡이친 직장인처럼 불안했다. 그동안 혼자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퇴직하고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거실로 나와보니 창밖에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함박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도 계속 눈이 내리는데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적막했다. 겨울바람 때문에 가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함박눈의 움직임이 마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했다. 모든 소음이 제거된 진공의 상태에서 하얀 눈들의 공연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장관이었다.
공무원 시절, 눈이 오는 날이면 비상이 걸려 꽉 막힌 도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사무실로 나갔고 컴컴한 밤에 제설차를 타고 염화칼슘을 뿌리며 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눈보다 더 무서운 건 민원인과 기자들의 쉴 새 없는 전화였고 시간이 어찌 갔는지도 모르게 눈을 치우며 하루를 보냈던 기억밖에 없다.
30년을 눈은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었는데 처음으로 눈 오는 장면이 아름다웠고 그날의 고요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안에서 바라본 눈은 최고의 배경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되찾은 시간
바쁘게 일하면 여유시간이 생겨야 하는데 늘 바쁘기만 하던 나는 점점 속도에 지치고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모모'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 다시 생각난다. 꼬마 모모는 작은 마을 원형극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을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 저축은행에 근무하는 회색 신사 직원들이 마을에 나타나면서 평화롭던 마을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삶은 ‘시간 낭비’라며 시간을 저축해 준다면서 시간을 빼앗아 갔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모를 찾아오던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며 발길을 끊었다. 사실, 모아놓은 시간은 회색 신사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모두 사용해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시간에 쫓기며 쉬지 않고 일했다.
현재를 즐겁게 사는 모모와 미래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는 회색 신사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난 30년, 여유로운 삶은 시간의 낭비라는 회색 신사의 꼬드김에 넘어간 사람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살았다. 허망하게도 나의 시간은 그 어디에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생각해 보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생의 시간을 써버리는 거고 목숨을 바꾸는 거와 마찬가지다.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바쁘게 일만 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었다.
지난해 12월, 퇴직하고 백수가 되어 바라본 눈 오는 창밖의 모습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색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창가에 앉아 따스한 봄 공기를 타고 올라가는 아지랑이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다. 은은하게 실내를 휘감는 부드러운 빛이 따스하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가끔 바람에 흔들리고 그 아래로 겨울을 잘 버텨낸 화분 속 식물들이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는 중이다. 나는 소파에서 무거워진 눈꺼풀을 못 이겨 고양이처럼 졸음을 쏟아내다 잠든다.
시간의 주인
시간을 되찾고 나의 시계는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가고 있다. 더는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가족과의 대화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건강을 해치지 않겠다고 늦었지만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해 본다.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시간이 생기면 뭘 해야 좋을 줄 몰라서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천천히 해보는 중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전부터 하던 영어 공부도 꾸준해, 가보고 싶었던 나라의 미술관을 다녀볼 예정이다.
낮에는 살갗을 간지럽히는 아지랑이를 보며 평온한 시간을 가지고, 저녁에는 지는 노을을 꼬박꼬박 챙겨보며 맛있는 저녁을 차려 먹고, 밤에 잠이 안 오면 기분 좋게 전해지는 봄바람에 몸을 맡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모! 이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온전하게 느끼고, 아침, 점심, 저녁이 주는 하루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는 인생을 살 거야'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 곳에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