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길들여진다.

시간이 가면 저 벽에 기대고 의지하게 되지.

by 이소희


아침은 늘 분주했다.

눈뜨자마자 샤워기 물줄기로 아직 몽롱한 나를 깨우고 채 마르지 않은 머리로 밥 대신 커피를 들고 출근했다.

분주히 시작되는 업무와 밤늦은 문화행사까지 참여하고

가로등 아래 나보다 두 배는 키 큰 내 그림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늘 그러고 사니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가 하며 살았다.


퇴직으로 고요해진 일상이 편안하지만, 한편으로 낯설다.

남편과 딸이 출근하고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다.

세상 밖은 빠르게 움직이는데 나만 정적 안에 갇힌 느낌이 생소하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이런저런 잡념이 들 때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삐 움직인다.

김치찌개와 오이지무침, 계란찜 한두 가지 서툰 요리를 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퍼 혼자 아침을 먹는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과 수건, 옷가지들을 주워다 세탁기에 넣는다.

그사이 로봇 청소기가 거실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세탁기와 청소기 돌아가는 기계음과

설거지하는 소리가 섞이면 쓸데없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아버지가 오십쯤 되었을 때,

일요일이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같은 철 지난 일요 명화를 즐겨보셨다.

어쩌다 일찍 일어난 아침이면 등 굽은 중년의 아빠는 돋보기를 끼고 '리어왕'과 같은 중고등학교 필독서인 고전을 읽고 계셨다.

아빠 눈도 안 보이는데 왜 재미없는 두꺼운 책을 읽어? 내가 그 나이면 놀지 그딴 책은 안 읽겠다.

그때 그 시절 아빠는 검은색이 도는 짙은 장식장에 할부로 전집류 도서를 사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우리 어릴 때는 밥도 거르며 겨우 학교 다녔는데 책을 어떻게 구해?.

교과서도 없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배 안 곯으면 다행이었지.'

아빠는 고개 한 번 들어 힐긋 나를 보더니 남 이야기하듯 말하고 다시 책을 읽고 계셨다.


아버지 나이가 되고서야 나도 오래된 영화나 도서를 찾아서 보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지난달, 영화 '쇼생크 탈출'의 원작 소설인 스티븐 킹의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읽었다.


그리고 오늘, 1995년 팀 로빈스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쇼생크 탈출을 영화로 봤다. 보통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화는 원작만큼이나 감동이 있는 영화다.

쇼생크 탈출에서 브룩스(Brooks)라는 인물이 가석방이 결정되자 동료 목에 칼을 들이대며 한바탕 난동을 부린다. 이유는 동료를 죽이고 계속 교도소에 남고 싶어서였지만 불발로 끝나고 교도소를 나와 버스를 탄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버스 앞좌석을 힘껏 부여잡고 낯선 장소로 가는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주름진 얼굴과 꽉 다문 입술, 텅 빈 눈빛이 한참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반백 년 교도소에만 있던 사람이 바깥세상을 감당할 수가 없어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자살하면서 쇼생크 감옥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어떤 마음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친구들

바깥세상에서는 모든 게 너무 빨리 움직여

어렸을 때 자동차를 딱 한 번 봤는데

지금 사방에 자동차 천지

온 세상이 전부 바빠진 것 같다.


난 밤이면 잠을 설쳐.

절벽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지

겁에 질려 잠에서 깨.


난 여기가 싫어.

항상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지쳤어.

여기 있지 않기로 했어.'


브룩스는 50년 동안 교도소 안에서 살았고, 그 긴 시간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다.

죽음보다 무서웠던 삶, 길들여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싶다.


설마 30년 공직 생활이 나에게도 브룩스의 교도소처럼 세상 전부는 아니었는지?

그 안에 길들여져서 현재가 낯설었던 건 아닌지?

브룩스가 죽는 장면에서 내내 거북하고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저 벽을 원망하지. 하지만 시간이 가면 저 벽에 기대게 되고 나중에는 의지하게 되지.

그러다가 결국엔 삶의 일부가 돼버리는 거야.'

래드의 대사처럼 벽에 기대어 의지하게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거는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자유를 향한 희망을 가지고 끝내 탈출에 성공한다.



두 가지의 삶!

필요에 따라 길들여진 삶, 희망을 품은 자유로운 삶

월급과 승진이란 분절된 달콤함에 자유를 담보로 30년 조직 안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말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조금 멀리 내다보며 조급하지 않은 인내심으로 삶을 그려나갈 계획이다.


빠른 배속으로 움직이던 시계가 이제야 제 속도를 찾은 기분이다.

매일 아침, 부산하게 울리던 알람 소리를 맞출 필요도 없고

신체 리듬에 맞는 속도로 일어나 천천히 내 삶을 살면 그만이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보고 싶은 책을 골라 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었다.

길들지 않은 나의 자유로움을 찾아 떠나는 앤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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