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한 달 후 이야기

가지 않은 길, 미련은 있다.

by 이소희


삶이 고요해졌다.


아침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 창밖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난 한 달, 퇴직하고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오늘 저 창밖 풍경이랑 비슷했던 것 같다.

두어 시간 지나 안개가 걷히자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뿌연 안개처럼 혼란했던 한 달이 지나고 이제 나의 삶도 고요해졌다.


원두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잔으로 떨어지는 커피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코끝으로 진한 향이 느껴진다.

신선한 원두를 수동그라인더로 굵고 거칠게 갈아 만든 커피는 맛이 깊고 그윽하다.

아침마다 직접 만든 드립 커피를 즐기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커피 좀 아는 여자 같다고 농담을 던진다.


차 한잔 마시고 서둘러 검은색 에코백을 들고 집 앞 도서관에 들려 이번 주에 읽을 책 몇 권을 빌려왔다.

필력이 한참 부족한 실력으로 글쓰기를 하니 어휘력과 표현력에 아쉬움이 많다.

많은 작가들이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독과 필사를 추천한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랑 김기연 작가의 '레코드를 통해 어렴풋이'를 필사하고 낭독까지 병행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머릿속이 소란스러울 때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본다.

흩어진 생각의 조각조각을 퍼즐 맞추듯 쓰다 보면 언젠가 정리될 것 같다.



가지 않은 길, 미련은 있다.


일요일 오후, 동료 B로부터 전화가 왔다.

B와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있는 사이다.

바쁜 B는 주말에 가끔 안부를 물어본다.

밝아진 목소리로 새로 시작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B도 빨리 퇴직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에 공허함이 느껴진다.

얼마나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짐작이 가는지라 짠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인생이란 긴 여정 속에서 수많은 갈림길과 마주하게 된다.

깊은 고민 끝에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걱정, 불안, 두려움으로 달아나고 싶을 때

여지없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밀물처럼 밀려들 때가 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퇴직에 대한 미련을

퇴직을 한 사람도 섣부른 결정이 아니었는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정거장에서 잠시 내렸을 뿐이다.

오피스 빅뱅이란 말이 '트렌드 2023'에 소개되었다.

직장문화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의미로 빅뱅이란 단어를 썼다.

승진보다 가치 있는 삶, 조직보다 개인, 평생직장보다 잡노마드가 더 매력적인 세상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대퇴사’ 현상과 ‘조용한 퇴사’가 열풍이라고 한다.


이른 아침, 밥 한 수저 먹기 싫을 만큼 피곤한 몸으로 출근하려고

빈속에 진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인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평범한 일상 같아 보이지만, 삶은 늘 전쟁터였다.


조직은 혁신과 변화를 이야기했지만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고

갑들의 위력에 기한 번 펴지 못한 을일지라도 원칙과 기본은 늘 지키려 했었지만

답답한 공직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쩌다 대퇴사(The Great Resignation) 현상에 합류했다.


MZ세대는 능력이 있어 N잡러, 잡노마드세대에 잘 적응한다지만

기성세대는 가족과 미래를 위해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절실했고

자존심쯤은 일찌감치 버리고 전쟁터 같던 직장생활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B가 다시 전화하면

나는 월급이 줄어든 만큼 소비도 줄었지만

더 이상 을의 힘겨운 삶의 무게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다고 말해 주고 싶다.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직장은 인생의 종착역 아닌 정거장일 뿐이다.

그 이상 의미 부여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