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TV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몇 해 전 ○○주민자치센터 동장으로 1년 6개월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고민거리 중 하나가 물건을 쌓아두고 사시는 어르신 안부였다. 마을 주민 이야기로 알게 되어 몇 차례 방문했지만 만나는 데 실패했다. 방에 물건을 많이 쌓아두어 혹시 무너질까 걱정이었다.
그 후 몇 차례 시도 끝에 만났지만 한 사람 들어갈 공간밖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끝내 치우는 것에 반대해서 약간의 여유 공간만 만들어 드리고 안부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두 해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방안에 수건과 양말, 속옷, 선물로 준 화장품이 가득했다. 동네 경로잔치 때 신이 나서 받아오신 수건, 사우나 개업 때, 백화점 착공식 날에, 받아온 수건만 봐도 아버님이 어디를 즐겨 다녔는지 알 수 있다. 그 흔한 수건도 아끼며 사셨는데 자식과 조카들이 사다 준 양말과 속옷, 목도리, 비누, 치약은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큰 박스 안에 가득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흑백 TV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방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시아버지의 냄새가 오랫동안 베어있었다.
어린 시절 형제 많은 집 둘째 아들로 어렵게 살아서 새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물건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고 남편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 또한, 직장을 다닐 때 집이란 잠만 자는 곳이었다. 돈을 벌어 옷가지와 화장품, 구두 등 보이는데 필요한 물건만 사들였다. 그 물건들은 위한 집이 된 지 오래다. 물건이 턱 하니 자리 잡은 집에 우리는 늘 손님처럼 잠만 자고 빠져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뭔가에 집착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악착같이 뭔가를 일구어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마음 한켠에 공허함이 떠나지 않았다. 그 허전함이 싫어서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 힘썼던 것 같다.
이제, 가볍게 살고 싶다.
1월 20일 월급날이면 통장에 찍히던 숫자가 더 이상 볼 수 없다. 퇴직이 실감이 났다. 퇴직으로 월급은 사라졌지만 24시간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많아진 시간덕에 차근차근 집안 정리를 해보기로 했지만, 하루에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 돈을 벌어 물건을 소비하는 일, 그 어이없는 일을 지난 몇십 년 동안 해왔구나.
나의 퇴직은 찌꺼기를 걸러내고 진짜를 발견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사람과 물건에 대한 정리작업이다. 지금부터 좋은 사람만 만나고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살기로 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미니멀 라이프로 자연스럽게 입문하게 되었다.
가급적 그날 필요한 것만 가게에서 구입하고 있다. 비닐봉지는 줄었지만 상품 포장이 과다해서 그런지 드라마틱하게 쓰레기 배출이 줄지 않는다.
아파트 분리수거의 날이면 산더미 같이 재활용품이 쌓인다. 사람들은 분리수거를 잘하지만, 환경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환경문제를 분리수거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부에서 과다포장에 대한 규제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개별포장에 전체포장을 하고 고급 포장지에 또 한 번 멋을 내고 리본을 달아 물건을 받을 때 기쁨보다는 이제는 짜증이 난다.
꽃을 선물한 이에게 미안하지만, 꽃을 받고 과한 포장지로 집에 가지고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꽃이면 충분하다.
겉 포장보다는 작고 단단한 진짜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