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지만 잔뜩 흐린 날씨 탓에 아직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두툼한 코트를 입고 어스름한 달빛 아래 퇴근하는 무리 안에서 걷고 있다.
번화한 곳이 싫어 도심에서 떨어진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동료들을 만났다. 2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인데 퇴직하고 나니 낯선 기분이 든다. 이제 나와 그들이 사는 세계가 달라서일까?
요즘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이 쏟아진다. '그냥 지내지 뭐.' 싱겁게 웃어넘겼다. 그들이 궁금해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인사로 건넨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겹살과 소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지 한 시간쯤 흘렀다. 올 7월이면 정년을 앞둔 J 과장이 이제 4개월 후면 민간인이 되는데 뭘 하며 인생을 보낼지 걱정이라고 말한다.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술잔 너머로 그의 주름진 눈이 공허했고 희끗희끗한 머리가 중년의 남자를 한없이 작아 보이게 했다.
B는 연신 술잔을 비우며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더니 취기가 올랐는지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사내정치하는 놈들이 보기 싫다'며 울분을 터트린다. 직장생활에 사내 정치력이 상당하다는 것쯤은 신입도 알 텐데 새삼 열을 내는 B가 상처받는 일이 있었나 보다. 취기를 빌려 큰소리는 쳤지만 그만두지는 않을 거다. 늘 그랬듯이 그는 아무 일 없듯이 내일 출근을 하며 악착같이 버텨낼 거다. 그에게는 돌봐야 할 노모와 아직 학비 걱정할 두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볕이 화창한 날도 속수무책으로 비바람 치는 날도 만났다. 2022년이 그런 해였고 나의 몸 세포 하나하나가 지쳤다는 신호를 보냈다. 더 이상 희망 없는 직장에서 의욕이 작동하지 않던 날, 나의 열심도 수그러들고 술자리에서 푸념조차 하지 않고 나는 그만두었다.
사는 것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성실하게 근무해 정년을 맞이하는 사람도 남은 앞날을 희망하기보다는 불안해한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전쟁터 같은 삶의 무게에 힘들어한다. 직장이 싫다고 떠난 나도 뿌연 안갯속을 걷듯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내고 있다.
각자의 이유로 삶이 고달픈 우리는 술잔만 기울이며 이 밤을 또 그렇게 보내고 있다.
오래전, 네 명의 여자가 홍콩과 마카오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여행 마지막 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성 바울 성당'과 '세나도 광장' 주변을 한나절이 넘도록 돌아다녔다.
마카오 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한 탓에 점심때가 지나자 급속히 허기가 밀려왔다.
미리 검색한 맛집을 복잡한 골목길을 돌며 겨우 찾았는데 공교롭게 '한 달간 휴업'이란 안내문과 함께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맛집을 찾아 30여 분이나 걸었는데 이번에는 브레이크 타임에 걸렸다. 오후 3시, 허기진 네 명의 여자는 망설임 없이 눈에 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화려한 금박 장식의 레스토랑에서 카지노 게임을 보며 고급스러운 마카오 현지 음식을 먹었다. 마치 영화 속 거액의 판돈을 가진 귀부인들처럼 우아하고 세련되게 여행의 마지막 오후를 즐겼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바쁘게만 살다 보니 저만큼 가버린 시간의 덧없음만 남은 기분이다. 나의 노력이 쓸모를 다해 폐기된 서류뭉치처럼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는데 내가 원하는 삶조차도 몰랐다니 허망하다.
난감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카오 여행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문이 닫혀있기도 하고 끝까지 못 갈 때도 있다. 실망하지 마라. 문이 닫히면 새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다른 경로에서 더 빛나는 목적지를 만나게 되는 행운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 느낀 이 허망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나를 기록하며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이다. 한 자 한 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나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 중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껌벅이는 커서 앞에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완성하지 못한 글을 붙들고 잠 못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