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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Nov 25. 2023

달리와 츄파춥스

몇 개월 전 직장 동료인 A 언니가 명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언니!!!

우리 미술관 전시 같이 다니지 않을래요?

지금 생각해 보니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도 아닌데 불쑥 전화해서

안부도 아니고 이젠 좀 전시 다니며 놀자고 했으니 참 이상했을 법도 했다.


A 언니는 반가운 목소리로 '그래. 나도 너무 좋아. 아예 한 달에 한 번으로 정해 주기적으로 다니자.'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A 언니,

30년을 넘게 친하게 지낸 동기 언니 B,

올해 백수대열에 참여한 얼굴 이쁜 동료 C, 


이렇게 합이 맞아 모이기 시작한 네 명의 여자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문화행사를 즐기기 위해 미술관 전시를 보러 가는 날이다.

왜 미술관이었을까?

직장을 다닐 때 평일 공연을 보고 한낮에 커피를 마시는 거는 나의 로망 중의 로망이었다. 

일하면서 만난 인연이지만 일이 아닌 장소에서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멋진 하루를 같이 하고 있다. 


이번 달에는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라는 전시를 빛의 시어터에서 봤다.

쌀쌀한 날씨에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며 2시간이나 걸려 워커힐까지 갔지만 전시 보러 가는 길은 행복하다. 

버스에서 내려 워커힐까지 걷는 길이 언덕이지만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니 멋진 뷰맛에 힘들지 않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구에서 티켓팅하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빛이 차단된 암흑 같은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주춤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되어 멍하니 입구에서 서 있다 관람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몇 사람들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캠핑 온 것처럼 매트에 누어서 관람하고 있었다.

전시 보는 방법도 이색적이고 신선하다.

우리도 신발까지 벗고 기둥에 기대어 다리를 쭉 펴고 가장 안락한 자세로 작품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펼쳐지는 영상 속 달리의 초현실 작품들이 눈앞에 다가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확대된다.

달리가 구현한 몽환적인 작품을 누어서 보니 내가 달리의 꿈속에서 유영하고 있는지 전시를 보고 있는지 헷갈린다.



콧수염과 5:5 가르마를 한 달리를 알게 된 건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가 츄파춥스의 로고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화이트데이에 남자 직원이 의무감으로 건네준 츄파춥스는 인기가 없어 책상 팬보관함에 한동안 꽂혀있었다.  

츄파춥스도 자기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마 잊었을 거다.

아니 쓰레기통으로 가게 될 운명이라고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시간만 소진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변화무상한 직장인의 하루, 

날씨도 더운데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여름날, 

멍하니 있던 츄파춥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내 손에 잡혀 사정없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택해 준 고마움 때문인지 츄파춥스는 최대치의 달콤한 맛을 내며 그날 봄눈 녹듯 사라졌다.

달콤 살벌한 츄파춥스의 추억!!!

무심하게 입에 물고 있던 이 츄파춥스의 로고가 달리의 작품이라니 새삼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콧수염을 한 괴팍한 달리의 작품 속에 갈라라는 여인의 모습이 여러 차례 영상으로 나온다.

달리를 초현실주의 대표 작가로 이끌어낸 여성 갈라는 달리의 일생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갈라는 달리의 작품 속에서 요염한 여인처럼 때론 종교화 속 성모의 모습으로 거룩하게 빛나고 있다. 


언니! 언니는 남편이 화가라서 나체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벗을 거야?

아니~ 절대~   못 벗지. 

재미난 상상을 하면서 짓궃은 농담을 건네었는데  

반색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너는? 

나도 못 벗을 것 같아.

달리도 갈라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 


광기와 사랑 그 어디쯤에서 수천 볼트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 운명의 연인


갈라는(1894∼1982) 폴 엘뤼아르(1895∼1952)와 결혼했으나 그녀보다 10살이 어린 달리를 만나 엘뤼아르를 버리고 달리의 뮤즈가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내 어머니보다 더, 내 아버지보다 더, 피카소보다 더, 그리고 심지어는 돈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했다.

갈리에게 배신당하고도 폴 엘뤼아르는 평생 갈라를 사랑 했다고 하니 그녀의 매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나의 로망대로 전시가 끝나고 우아한 식사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아는 언니가 준 묵은지에 참치통조림 하나를 넣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귤 몇 개와 아몬드가 담긴 유리병이 식탁 위에 심드렁하게 놓여 있다. 

살짝 말라버린 귤을 까서 입에 넣고 핸드폰을 보며 전시를 검색해 본다. 

무심코 입에 넣었던 귤이 말라서 당도가 올라갔는지 달콤하니 맛이 좋다.


'폼페이 유물전 - 그래 그곳에 있었다.'

내년에 이 전시가 더 현대에서 개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거처럼 기뻐하며

'이 전시 어떨까요?' 단톡방에 띄운다. 

'모두 좋아요.' 

오케이 다음 전시는 너로 정했어.

카톡을 하는 사이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춤을 춘다.

김치찌개 국물이 가스레인지 위로 사방 튀어 지저분해지고서야 가스 불을 잠겼다.


좋은 전시를 기다리는 건 츄파춥스를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단맛을 오랫동안 맛보는 일처럼 행복하다.

전시를 보는 일은 밋밋한 일상에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설렘을 느끼게 해 준다.

어떤 의무와 책임도 없이 그저 좋아서 떠나는 홀가분한 여행,

매번 다음 전시가 더 기대되는 중독성 강한 나의 우아한 취미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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