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리고 - 1장>

그리고 시즌 中 봄

by 이작가야



[1장]


밝은 빛이 무대 전체를 비추면, 벚꽃나무와 벤치가 보인다. 벤치 밑에는 비어있는 맥주 캔들과 생수병들이 흩어져 있다. 기태는 술에 취한 채 벤치 위에서 자고 있다.

잠꼬대를 하다가 벤치에서 떨어져 깨는 기태, 비몽사몽 상태다.

몽롱한 상태로 벤치를 빠져나온다.


기태 (관객에게) 어젯밤. (사이) 연재 집.


기태, 소파 쪽으로 이동해 자리 잡고 핸드폰 게임을 한다.

연재, 등장해 매우 차분하게 기태 옆에 앉는다.


연재 (밖을 보며) 안 나가?

기태 어딜 나가, 밖에 추워.

연재 …….

기태 심심해?

연재 그냥

기태 …….

연재 기태야.

기태 (게임하고 있다)

연재 똑같아 항상, 그렇지?

기태 아 죽었네.


연재, 몸을 돌려 기태를 바라본다. 기태, 재미없다는 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연재, 기태에게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기태 왜 그래? (짜증나서) 밖에 나가자고?

연재 …….

기태 (연재에게서 빠져나가며) 뭐 하는 거야?

연재 생각했어. 아니 그냥 느껴봤어.

기태 뭘?

연재 너랑 붙어있어 봤다고.


연재, 기태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기태는 연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다시 만진다. 무언가 발견한다.


기태 (생각난 듯) 아, 오늘……. 화났어?

연재 …….

기태 새삼스럽게 왜 그래? 5년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잖아. 애들도 아니고.


연재,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본다.

기태, 다시 핸드폰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기태 (게임하며) 뭐 시켜먹을까? 오늘은 맛있는 거 먹지 뭐.

연재 괜찮아.

기태 아, 알았어. 나가서 먹자. 내가 살게! 내가 큰 결심했다.

연재 그만하자.

기태 이제 좀 풀어라. 알잖아 나 돈 없는 거.

(애교부리며) 선물은 다음에 꼭 준비해서 줄게 응?

(장난치며) 사나이 권기태! 몸은 연재 씨 집에 얹혀살아도, 마음만큼은 얹혀살지 않는다.

사랑한다!

연재 그만하재도.

기태 (한숨 쉬며) 삐졌어? (사이) 연재야, 나도 힘들어.

취업이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해해 주면…….

연재 알아, 이해해. 그러니까 그만 하자고.

기태 …….

연재 우리.


연재, 천천히 일어나 퇴장한다.

기태, 서서히 일어나 벤치로 간다. 떨어져 있는 신문 하나를 집어 들고 구인 구직란을 본다.


기태 (신문을 던지며) 망할, 갈 곳이 없는데…….


잠시 후, 무언가 급한지 주변을 둘러보는 기태. 벤치에서 일어나 공터 주변을 맴돌다가 벤치 옆 나무 뒤에서 볼일을 본다.

나무에 달린 메모지가 눈에 들어온다.


기태 왕자는 백치를 만나…… (다른 것을 뜯어) 백치는 마녀란 소리를 듣고……

백치마녀는 행복하게 살았다……. (손을 닦으며) 뭐야 이거.


다시 벤치에 눕는 기태. 추운지 옷을 여미다가 잠든다.

무대 뒤편에서 아라 등장.

떨어진 메모지를 발견하고 제자리에 붙이기 위해 나무 뒤로 가는 아라.

아라의 비명소리.

이내 아라는 젖은 메모지 몇 장을 들고 나온다.

벤치에 누워있는 기태에게 다가가는 아라, 벤치를 발로 차 기태를 깨운다.

기태, 놀라 일어난다.


아라 (떨어진 메모지를 들이밀며) 그 쪽 짓이에요?

기태 네?

아라 당신이 한 거냐고.

기태 내가 뭘? 아니 왜 반말을…….

아라 이게 뭔 지는 알아요?

기태 …….

아라 뭔지 아냐고 묻잖아요?

기태 종이. (사이) 쪽지?

아라 (갑자기 울며) 그 쪽이 다 망쳤잖아요. 여기서 만나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아…….

기태 (당황하며) 아니, 뭐… 뭐가… 무슨, 네? 왜, 왜 그러시는 건데요?

(우는 것을 달래며) 내가 미안해요. 아니 그런데 뭐가, 뭐, 뭐야 이거?

아라 (갑자기 진정하며) 책임져요.

기태 또 뭘?

아라 (메모지를 내밀며) 이거요. 책임지시라고요.

기태 알겠어요. 내가 메모지 사드릴게요. 두 개 사서 드릴게. 됐어요?

아라 (메모지에 얼굴을 파묻으며) 이게 어떤 건 줄 알고…….

기태 그런데 그 메모지 그렇게 얼굴에 대고 그러시면 안 될 텐데…….

아라 (떨어진 생수병을 들며) 여기다가 물을 왜 버려요? 다 자란 나무에 물 줄 일 있어요?

기태 물은 주지 않았어요.

아라 그럼 뭔데요?

기태 말할 수 없어요.

아라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됐고, 내려가요.

기태 네?

아라 내려가시라고요.

기태 (사이) 왜요?

아라 여기 있을 거 에요, 그럼?

기태 네, 여기 있을 건데요. 지금 전 여기 있어야 해요. 갈 곳이 없어서…….

아라 죄송한데요. 여기 제가 오늘 내일은 꼭 있어야 하거든요? 약속이 있어서요.

기태 그런데요?

아라 그러니까 내려가시라고요. 약속이 있으니까.

기태 이 공터 당신 거 에요?

아라 아뇨.

기태 벤치랑 나무, 흙, 기타 등등 뭐 이런 거 당신 거 에요?

아라 아뇨.

기태 그러면…….

아라 아니요. 이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렇게 하세요?

기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신이 하고 있잖아요.

아라 (한숨 쉬며) 여기, 제가 약속이 있으니까 내려가시라고요. 못 알아들어요?

기태 그러니까 내가 왜 내려가야 하냐고.

아라 (또박또박) 내가 약속이 있으니까.

기태 또라이네.

아라 네?

기태 아뇨, 내려 갈 거 에요. 예, 내려갑니다.

아라 치우고 가셔야죠.


기태, 맥주 캔들을 봉지에 담고 내려가려다 멈춘다.

지갑을 꺼내 확인하는데 비어있다.

다시 벤치로 돌아온다.


아라 뭐죠?

기태 (지어내며) 저도 약속이 있어서요.

아라 안 돼요.

기태 그러니까 저도 제 약속이 있어서…….

아라 아까도 말했잖아요. 약속이 있다고. 여기서, 내가.

기태 알아주는 또라이네.

아라 가던 길 가세요.

기태 난 다른 곳에서 만날 건데, 시간이 떠서 그러니까, 예?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알겠죠? 예?


아라,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짓한다.

아라와 기태 어색한 정적.

기태, 나무쪽으로 가 메모지를 본다.


기태 그쪽이 쓴 거 에요?

아라 건들지 마요.

기태 아, 안 건드려요.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아라, 아무런 대답 없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웃음을 짓는다.

기태, 이상하다는 듯 아라를 본다.


기태 여기다가 이렇게 붙여 놓으면 잃어버리지 않나?

아라 …….

기태 사람들 지나가다가 장난치면 어쩌려고 그래? 소중한 거라면서.

아라 여기 사람들 안 와서 안 잃어버리고요, 중간 중간 말 놓지 마세요.

기태 참나 알겠습니다. (사이) 그런데 나 여기 와 있는데?

아라 그게 왜요?

기태 사람들 안 지나다닌 다면서요.

아라 (사이)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기태 (당황하며) 그냥, 지나가다가…… 이쪽으로 오고 싶어져서……? 왜요, 뭐 또?

아라 원래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어요.

기태 산 밑에 뭐가 많이 들어와서 사람들 자주 왔다 갔다 할 텐데.

아라 …….

기태 (나무쪽으로 가서) 이 나무도 손 많이 타고 그럴 텐데.

아라 알았으니 조용히 해요. 약속 시간 다 되어 가요.

기태 네, 가만히 있을 테니 일 보세요.


아라, 갑자기 나무 뒤로 숨는다.

승현, 나무 뒤에서 책을 들고 등장해 벤치에 앉는다.

나무에 걸린 등이 한번 깜빡인다.


기태 (놀라서) 뭐야? 이봐요, 왜 그래요? 무섭게 진짜. (혼잣말로) 미친 건가?


기태, 혀를 내두르며 퇴장.

아라, 승현을 놀라게 하기 위해 소리를 친다.

승현, 받아주지 않는다.


아라 뭐야, 재미없게.

승현 (책을 펴며) 잠깐만.


승현, 나무에 있는 메모지를 한 장 떼어내 무언가 확인한다.


아라 (메모지를 보며) 이거 누가 떼어 가면 어쩌려고.

승현 안 떼어 가던데? 여긴 아무도 몰라.

아라 무슨 자신감이래? (사이) 이 나무도 불쌍하다 메모지랑 사진을 덕지덕지…….

승현 기억 나무.

아라 응?

승현 그 나무 이름이 기억 나무야. 어렸을 때부터 생각나는 것들을 다 붙여 놨거든. 그래서 기억 나무.

아라 유치해. 너무 유치해.

승현 어렸을 때 지은 거라 그런 거야. 그런데 나름 느낌 있지 않아?

아라 뭐가?

승현 이 나무에 내 과거가 다 있는 거잖아. 종이 하나하나가 내 파편들 같아. 그 중 가장 큰 파편이

우리 아라!

아라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말은 잘 해. 많이 오그라들긴 해도 뭐…….


승현, 생각난 듯 벤치에서 일어난다.


승현 내가 이번에 쓰려고 하는 동화가 있는데 한 번 들어봐.

아라 또 말도 안 되는 거 써왔지?

승현 아니야, 이번엔 느낌이 좋아. (사이) 우리 아라 생각하면서 썼으니까-!

아라 그래? 한 번 읊어봐.

승현 옛날 어느 아름다운 왕국에 훌륭한 왕과 왕비가 살았어.

왕과 왕비는 선정을 베풀 며 왕국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아, 그 둘에게는 왕자가 있었어. 잘 생겼고, 싸움 도 잘하고, 심지어 착하기까지 했지.

(아라에게) 그 왕자의 모티브가 바로 나야.

아라 알겠으니 계속 해봐.

승현 시간이 흘러 왕자의 혼기가 찼고, 왕과 왕비는 왕자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주변 나라에

사자를 보냈어.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공주들이 이 왕국으로 찾아왔지.

아라 하지만 왕자는 공주들과 결혼하지 않았지?

승현 (사이) 그렇지?

아라 뻔하지. 벌써부터 지루해. 클리셰 덩어리야.

승현 (낙담한다)

아라 재밌어, 재밌으니까 계속해봐. 왕자는 어떤 여자를 원한거야?

승현 왕자는 특이하게도 백치 신부를 원했어.

아라 (모르는 듯) 백치?

승현 응, 백치. 바보 같은. 약간 모자란?

아라 (사이) 그게 나야?

승현 (사이) 응.

아라, 일어나 승현을 때린다.

승현, 아파하다가 아라를 껴안는다.


승현 그만, 그만. 아파.

아라 (꿀밤 때리며) 이걸로 봐주지. (승현의 무릎에 누우며) 그래서 백치가 뭐?

승현 그래서 왕자는 마을로 내려갔어. 자신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는데 자신이 원하는 신붓감이 없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생 각하고 있던 신붓감의 여자가 있다는 곳을 듣게 됐지. (사이) 자?

아라 (눈 감고) 아니, 좋아서.

승현 그렇지? 이 동화 괜찮지? 갑자기 딱 떠올라서 썼는데…….

아라 아니, 목소리. 오빠는 목소리가 참 좋아. 얼굴은 별로.

승현 …….

아라 오빠 목소리 듣고 있으면 다 잊히는 기분이야. 힘든 몸도, 불안한 마음도.


승현, 아라를 내려놓고 나무에서 메모지 하나를 떼어내 퇴장한다.

나무에 걸린 등이 꺼진다.


기태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봐요? 왕자가 어쩌고, 백치가 어쩌고. 조아라는 뭐야? 그 쪽 이름?


얼굴을 감싸는 아라.


기태 아라 하트 승현? 아 남자친구? 남자친구 이름이 승현 이에요? 여기가 추억 뭐, 그 런 나무네.

낭만적이다 정말. 그래서 아까 그 난리를…….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아라.


기태 아니 왜 울어? 무섭게 진짜.

아라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

기태 (깨달으며) 아, 헤어진 거였어? 못 잊은 거야? 말을 하지.

(옆에 앉으며) 사실, 저도 어제 밤에 이별했어요. 5년 만난 여자 친구랑…….

걔네 집에서 쫓겨나 갈 곳도 없 고 해서 이렇게 노숙하고……. 우리, 같은 입장이네요.

힘내요,우리! 깔끔하게 잊 고! 새 출발! 예? 파이팅 하자고, 파이팅!


아라, 눈물을 닦는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일어난다.


기태 저기요, 메모지는 내가 정말로 미안합니다! 여기서 헤어진 남자친구 다시 보기로 한 거죠?

내가 비켜드릴게. 갈게요.

아라 괜찮아요.

기태 왜? 약속 있다면서요. 부디 좋은 시간 되시고.

아라 (갑자기 진정하며) 아니에요. 저 일 다 봤어요.

기태 네?

아라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라, 퇴장.


기태 (황당해서) 도대체 뭔데?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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