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헬퍼와 함께한 첫 한국 여행, 그리고 마음의 변화
아기가 5개월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니젤과 함께 한국에 다녀왔다.
제주도는 필리핀 비자가 필요 없는 유일한 지역이라, 비행기 티켓만 한 장 더 끊으면 되었고, 남편은 싱가포르에서 일을 해야 해서 나 혼자 아기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비행기 안에서 니젤은 아기를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아기가 찡찡대면 재빠르게 분유를 타주고, 지루해하는 것 같으면 장난감으로 주의를 끌어주었다.
아기의 대부분 시간을 내가 품에 안고 있었지만, 옆에서 든든하게 도와주는 니젤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우리 어머니는 니젤을 무척 아끼시고 감사히 여기신다.
매일같이 카톡으로 "필리핀 언니에게 잘해라", "너의 아기를 돌봐주는 사람이니 늘 고마운 마음을 가져라",
"갑질하지 말고 항상 사람답게 대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하지만 처음 헬퍼와 함께 살던 반년 동안, 나는 주변의 조언을 따라 니젤과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사적인 이야기를 피하고,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싱가포르에서 들은 여러 헬퍼 관련 불편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관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벽을 쌓았던 것 같다.
고용주로서의 역할도, 니젤의 존재도 처음엔 참 어색하고 낯설었다.
니젤이 청소를 할 때면, 나는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일하는 걸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때는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 어머니는 니젤에게 정말 아낌없이 대하셨다.
몰래 금목걸이를 사 두셨고, 갑자기 선물을 주시는 모습에 나는 놀라 "엄마, 나한테 왜 말도 없이...!"라고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었지만, 당시엔 '너무 잘해주면 헬퍼에게 눌려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집안일은 어머니가 맡으셨다.
식사 시간에도 니젤과 나에게 밥을 챙겨주시고, 어머니는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아기를 돌보셨다.
늘 식은 밥을 드시는 모습에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니젤에게 맡기고 엄마는 우리랑 같이 먹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까"라며 니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자주 볼 수 없는 딸과 손녀를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니젤에게 눈치를 주었다.
멀리 한국까지 와서 우리를 돌봐주려 고생하고 있는데, 나는 그저 ‘헬퍼’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마음의 선을 그었던 것이다.
내가 눈치를 주자, 니젤은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이것저것 일을 도왔다.
그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죄책감으로 아려왔다.
어머니는 제주에 있는 동안, 추운 날씨 속에서도 우리를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셨다.
오랜만에 친정인 한국에 오니 좋았고, 어머니께 아기를 보여드릴 수 있어 더욱 기뻤다.
그리고, 옆에 니젤이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일주일 간의 여행이 끝나고, 제주에서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공항 길.
입국장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언니한테 잘해라. 잘해라.”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기는 조용히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키도 크고 체격이 큰 나는 아기를 안고 비행 내내 자리를 지켰고, 나도 살짝 졸음이 밀려왔다.
그때, 옆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던 니젤의 화면이 슬쩍 보였다.
생리 주기 어플이었다. 나이를 입력하면 임신 가능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이었다.
나는 그냥 본 척만 하고 눈을 감았다.
착륙까지 한 시간이 남았을 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니젤,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어?”
그 질문에 대한 니젤의 표정과 대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생긴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 아기를 낳고 싶어요. 내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 순간, 나는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니젤도 언젠가는 가족이 있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아기를 품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안다.
그녀가 얼마나 아기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따뜻하게 돌보는지를.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녀가 우리와 조금 더 오래 함께해주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예쁜 아기를 낳고, 필리핀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