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어도 만다린도 통하지 않지만, 마음은 전하고 싶습니다
내 시어머니는 요즘 나와의 대화를 종종 놓치신다.
당신의 아들, 남편 이름조차 헷갈려 하신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생각이 또렷하시고 말씀도 똑부러지셨던 분인데,
3년 전 갑상선암 수술, 그리고 그 이듬해 소파에서의 낙상으로 엉덩이뼈 수술을 받은 이후
기억력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큰 수술 두 번.
몸은 회복했지만, 마음과 정신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평생을 홍콩에서 살아오셨다.
언니, 동생들과 시장을 다니고, 수다를 떨며 웃음이 끊이질 않던 삶.
하지만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 가족은 싱가포르로 이주했고,
그 순간부터 어머니의 언어는 닫히고, 세상은 조금씩 좁아졌을지도 모른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낯선 이웃.
하지만 어머니는 묵묵히 두 아들을 키워내셨다.
광동어 외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말없이 삼시 세끼를 준비하고, 묻지도 않는 외로움을 오래도록 감췄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누구도 그 고요하고 긴 외로움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이제는 나조차 당신의 기억에서 가물거리지만,
그럼에도 매주 어머니를 뵐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더 많이 웃어드려야지.
더 자주 말을 걸어야지.
광동어는 몰라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믿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더듬더듬 만다린으로, 때로는 바디랭귀지로 어머니께 말을 건넨다.
며칠 전, 내가 김밥 장사를 해보려 한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드렸다.
기억을 못하실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어머니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도 도울 수 있을까?”
그 짧은 말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한 마디는 마치 어머니가
'아직 나는 살아 있고,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래. 이번엔 미루지 말자.
작은 김밥 장사라도 어머니와 함께 해보자.
김밥을 싸지 않더라도, 포장 박스를 정리하거나 스티커를 붙이거나,
그저 앉아서 나를 지켜보시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하루가 조금은 덜 외롭기를 바란다.
어머니가 나를 잊으셔도 괜찮다.
나는 어머니를 기억하니까.
어머니가 사시는 날들 동안,
당신이 나를 딸처럼 느끼실 수 있도록,
나는 당신 곁에서 작은 희망 하나씩 놓아드릴 것이다.
“비록 내 이름은 몰라도, 며느리라는 존재는 기억하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