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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어 보이네요, 라며 웃던 그날

낯설었던 싱가포르에서 엄마가 되어가는 우리들의 기록

by 담연

싱가포르에서 나는 혼자였다.
남편이 전부였고, 사실 그와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편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 하나만으로 외롭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임신을 하고, 예상치 못했던 입덧이 시작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무김치가 먹고 싶었고, 씨 없는 한국산 거봉이 너무 간절했다.
복숭아는 또 얼마나 땡기던지.



하지만 남편은 그런 내 욕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 씨 있는 신 포도만 먹어본 사람, 복숭아는 사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
총각김치의 알싸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모르는 그가
어떻게 내 입덧의 허기와 위로를 채워줄 수 있었을까.



배는 고픈데 먹을 수 있는 건 없고,
하루하루 신물만 게워내며 침대에 누워 지내던 날들.
그때 나는 맘카페를 들여다보며, 나와 비슷한 상황의 임산부들 글을 읽는 게
유일한 위로이자 탈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싱가포르에 사는 93년생 토끼띠 엄마들 모임 만들어요!”
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나는 93년생은 아니었지만, 한 살 차이인 92년생.
왠지 모르게 그 제목이 너무 반가웠고,
어떻게든 이 카톡방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룹방에 들어가 보니, 여섯 명 남짓의 엄마들이 있었다.
모두 2023년 출산 예정인 한국인 임산부들이었고,
벌써 몇 차례 만나 교류 중인 사이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입덧이 너무 심해
그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고,
26주차 무렵에야 겨우 첫 모임에 나갈 수 있었다.



장소는 싱가포르의 뎀시힐.
예쁜 레스토랑과 감성 카페들이 모여 있는,
마치 작은 정원 같은 동네다.



입덧 이후, 이렇게 예쁜 곳에 외출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그날,
첫 모임엔 나를 포함해 세 명이 모였다.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동갑내기 92년생 엄마,
그리고 이 모임을 만든 93년생 방장님.

한국어로,
엄마로서,
또 임산부로서
마음껏 수다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갑고 따뜻했던지.



모두 배에 아이를 품고 있었고,
우리는 딸기쉐이크와 생과일 주스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산책도 했다.



“우리 다음엔, 아이 낳고 만나려나요?”
하는 말에 다 같이 웃었다.



그렇게 타지에서,
우리 셋은 조금씩 ‘엄마’가 되어갔다.



그리고 진짜 엄마가 된 후,
모든 멤버들이 참여한 첫 모임이 열렸다.



이젠 아기들과 함께하는 만남.
그래서 우리는 큰 펑션룸이 있는 집을 정해 모임 장소로 삼았다.



누구 하나 먼저하랄 것도 없이,
모두가 아기 매트며 장난감을 바리바리 챙겨왔다.
아기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연스럽고 따뜻한 배려가 가득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헬퍼와 함께 참석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모처럼 커피를 천천히 마실 수 있었다.
함께 온 헬퍼들 또한 모두 인상이 좋았고,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점심을 배달해 함께 먹었는데,
엄마들은 헬퍼들을 위해 음식을 예쁘게 덜어 따로 챙기고,
디저트와 음료까지 준비해 놓았다.



그 광경을 보며 문득,
“내가 정말 좋은 모임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헬퍼를 시녀처럼 대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이 모임 안에서는 모두가 헬퍼를 ‘사람’으로 존중했다.
함께 아이를 키우는 파트너로서, 동등하게 대하는 분위기.
그게 참 좋았다.



헬퍼들이 아기를 봐주는 동안, 우리는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문득, 내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출산 막바지에 헬퍼를 들여 함께 지낸 지도 어느덧 6개월.
그런 내가 지금, 아이를 헬퍼에게 맡기고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는 모습이
낯설고 멋쩍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한 엄마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우리 헬퍼한테 아이 맡기고 이러고 있는 거… 너무 교양 있어 보이네요, 그쵸?”
하하하하.



그 말에 우리 모두 빵 터졌다.
순간,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태어나 처음 아이를 키워보는 우리 젊은 엄마들.
이 고독한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유연하게 버텨보려
각자의 집에서 헬퍼와 함께 공동육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그런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그때의 아이들이 하나둘 돌을 맞이하며,
함께 돌잔치를 축하하고,
‘육아동지’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곁의 헬퍼들과도
믿음과 고마움을 쌓아가고 있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끈끈하게.
우리, 그렇게 열심히 살아보자.

합동 돌잔치 2시간 전, 다른 엄마와 함께 풍선을 불며 파티를 준비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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