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정 Jul 21. 2022

지금 이순간 우도의 바다가 밀려옵니다

우도의 추억

     

 이른 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후드득 빗소리에 놀라 깨었습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들었는데 방안 가득 청신한 물 냄새 선득한 바람 기운이 넘칩니다. 당신은 지금 곤한 잠에 빠져 있겠지요. 당신에 대한 내 기억은 언제나 공간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추억은 공간을 품고 잠겨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불러내면 기억의 옷을 입고 의식 속으로 부표처럼 떠오르지요. 당신과 함께 갔던 어느 날의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생각하는 것은 한참이 걸리지만 공간은 이미 간간 짭조름한 해풍을 몰고 지금 여기로 밀려듭니다. 성산포 선착장에서 배를 타 우도 동천진항에서 하선했을 때 누운 소 모양의 아름다운 섬 우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산호사 해수욕장. 당신은 그 맑고 깨끗한 자태를 좋아했습니다. 호두알만 한 것에서 콩알만 한 것까지 하얀 산호 조각들이 바닷가 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요. 우윳빛인데 어떤 것은 분홍빛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만도 아니어서 아침에 보는 것과 해 저물녘 노을 속, 밤의 달빛과 별빛, 먼 등대 불빛에 의지해서 보는 것이 다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앉을 때마다 자그락자그락 자박거리던 산호 조각들. 양말을 벗고 걸어보니 그새 발가락 사이에 끼어 아리게 했던 산호 조각들.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앉아 옥색, 하늘색, 파란색, 코발트색, 잉크색의 다채로운 바닷물색을 감상하기도 하고 멀리 한라산의 장엄한 자태와 그 주변 오름들의 완만한 굴곡에 눈길을 빼앗겼었지요. 바다 저편 성산 일출봉의 자태도 생각나시죠?


 저는 검멀래 해수욕장을 신기해했지요. 가장 제주도다운 해수욕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검은색을 좋아해서 그런 걸 거라고 당신은 말했지요. 가장 기본적인 원색. 그러나 검은색에는 회색과 갈색과 다양한 빛깔이 숨겨져 있다고 답했지요. 색채와 놀고 색채에 홀렸던 미술가 마티스가 말년에 니스의 성당에 머무르면서 검은색을 주조로 한 추상적 화풍에 몰입한 것은 검은색이 주는 심원한 깊이, 오묘함 때문이었다고 제가 말했었지요. 높다랗게 쌓은 철책을 따라 계단길을 내려가는데 엄청 밝은 촉의 전구를 켜놓은 듯 반지르르한 윤기와 광채를 발사하는 검은 모래들! 순간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콧구멍 동굴도 재미있었지요. 입구는 콧구멍처럼 조그맣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고래가 살만큼 커서 경굴이라고 한다고 당신이 설명해 주었을 때 그곳은 요나의 공간 같아서 당신과 내가 사무쳐 깃들어 살아도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우도의 모든 곳이 아름답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인상 깊게 떠오르는 것은 늦은 밤 하고수동 해수욕장에 앉아서 바라보던 멸치잡이배의 환한 불빛입니다. 칠흑의 어둠 때문이겠지요. 먹빛 바다에 집어등을 환히 켜고 작업을 하던 모습을 보면서 어두운 밤에 켜놓은 사기방등 장명등 등불 같아서, 사월초파일 방생을 하면서 강에 띄우던 연등 같아서 이곳이 속계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인지 헷갈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중앙동 명신 여관의 욕실에서 나오던 그 짠물도 생각납니다. 하루 종일의 먼지 내음을 씻으려고 샤워기를 틀었을 때 나오던 그 짜고 쓰겁던 물. 물이 귀해서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바닷물을 섞어 생활용수로 쓴다는 말은 나중에야 들었지요. 샤워를 하고 나서 한참 동안 염장 생선처럼 몸에 소금기가 돌던 그곳.


빗소리에 잠을 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도의 기억들이 나를 깨웠던 것 같습니다. 먼지 내린 앨범 안에만 갇혀 있기가 답답해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잊고 쳇바퀴 돌리듯 살아가는 게 안쓰러워서 이 밤 나를 깨어나게 하고 다시 잠드는 것을 헤살지었던 것만 같습니다. 마음이 다시 서대는 군요. 한동안 번지수를 잊어버려 갑자기 수신인을 찾을 수 없어진 수취인 불명의 편지 같은 내 마음도 내 사랑도 오늘은 온탕 속에 잠긴 듯 따뜻합니다. 우리들은 너무 쉬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잊어버리지요. 그 황홀경의 순간들을 말입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도, 과거를 오늘에 불러내어 동무 삼아 살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았던 그 하고수동 해수욕장의 밤바다의 명멸하는 빛들도 지금은 달라졌겠지요.


모든 기억은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의 현재적 필요에 의해 편집되고 소추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추억은 생기를 잃은 채 박제화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당신. 그것만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도, 나의 열망에 의해서도 아닌. 그저 당신이라서. 당신이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늘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을 뿐입니다. 물젖은 대기가 오늘도 그리움을 싣고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새벽의 기운은 벌써 내게 와서 고조곤히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우도 사람들이 뽑는 8개의 절경

주간명월: 광대코지 해석동굴 안 좁은 틈으로 바다에 뜬 하얗고 둥근 보름달이 비쳐 드는 모습

야항어범: 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밤 멸치잡이배의 불빛

천진관산- 동천진항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능선

지두청사- 섬에서 가장 높은 우도봉에서 바라보는 우도의 절경

전포망도- 구좌읍 종달리 앞에서 바라보이는 우도의 소형상

후해석벽-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우도의 모습

동안경굴- 검멀래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콧구멍 동굴

서빈백사- 서천진동과 상우목동의 경계에 있는 하얀 산호 사장.       

이전 02화 사랑을 시작하는 첫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