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에 같이 가실래요?
개심사에 종종 다녀오곤 했습니다. 바우덕이의 혼이 서린 청량사, 텅 빈 충만을 경험할 수 있는 감은사지나 고달사지도 좋아합니다. 게눈 속의 연꽃을 볼 수 있는 보광사도 좋겠지요. 그러나 제게는 여전히 개심사입니다. 처음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준 절이라서일까요. 사랑에 홀리어 찾아간 절이었다가 사랑을 잃고 마음을 두고 온 절이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좋은 사람이 생기면 제가 훅닥이다 꺼내는 말이 '개심사 가실래요?'입니다. 포옹이나 입맞춤보다 아련한 사랑의 첫 고백이 제겐 개심사 같이 가실래요입니다.
최근에는 도통 가보지 않았습니다. 서산까지 몇 번 다녀왔음에도 개심사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그런 차가운 얼굴로 지내는 데 익숙해졌고, 당신 말처럼 살고 싶은 삶과 사는 삶 사이의 격벽이 두꺼워져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어두운 집에 오도카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밤이 내리고 비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어느새 세심동 개심사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합니다.
개심사 여행은 호젓할수록 좋습니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을 때 찾는 절이 개심사입니다. 처음 문학회 선배의 소개로 알음알음 개심사를 찾아 나섰을 때만 해도 제게는 멀고도 먼 절이었습니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운산에 내려 40분 넘게 걸어 개심사 입구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야트막한 산비탈길을 따라 세심동 개심사에 접어들 때까지 이 길이 도대체 어디로 이어지고 어디서 끝나는지 아득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초지들도 의미 없는 고단한 풍경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돌에 세로로 새겨진 세심동 개심사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란! 너무 화려하고 거대한 일주문이 아니라 작은 돌에 아름드리 새겨진 글씨가 정다웠습니다. 마음을 씻는 동네, 마음을 여는 절.
세심동 개심사 글자가 새겨진 돌을 지나 걷다 보면 법고를 놓아둔 안양루가 보이고 그 아래 고즈넉한 지당이 눈에 띕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해강 김규진 선생이 쓴 개심사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보통 일주문은 대웅전과 일직선상에 놓이는데 개심사 해탈문은 안양루의 오른편으로 비껴 있어서 성스러운 공간으로의 진입을 조금 유보하듯 몸의 동선과 시선을 에둘러 냅니다. 개심사의 절정은 겹벚꽃 피는 순간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스님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타고 눈이 아린 연분홍의 벚꽃이 겹겹으로 피어납니다. 안양루 누각 옆 벚나무가 미풍에 꽃잎을 떨구는 모습은 별유천지 비인간입니다. 이 절의 스님들은 모두 조경에 조예가 깊으신지 명부전 지나서 보이는 배롱나무 꽃과 심검당 앞의 수선화 모두 청아합니다. 줄기를 꺾으면 노란 물이 배어 나오는 애기똥풀은 노란색 아기자기한 꽃을 피워내며 우리를 반깁니다.
개심사 대웅전은 성종 15년에 중창된 주심포와 다포 집의 절충 양식의 건물로 보물 제143호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지붕이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듯한 맞배지붕 형태입니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아미타삼존불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 옆에 있습니다. 법당을 나와 왼편에는 채색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심검당이 보입니다. 스님들이 공부와 수행을 하는 요사채입니다. 인공적인 요소를 거의 배제한 채 천연 그대로의 굴곡과 결을 살리고 있어 손을 대면 나무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심검당 지나 해우소 가는 길도 정겹습니다. 해우소는 문이 따로 없고 나무판자를 얹어 만든 푸세식 화장실입니다. 발 아래가 훤하게 들여다보여 서양식 수세화장실에 익숙한 사람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량수각을 지나 명부전으로 갑니다. 명부전은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시왕들을 모신 곳입니다. 염라대왕은 시왕중 다섯 번째 왕으로 앞에는 명경대가 놓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불러놓고 죄를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명경대라고도 하고 업경대라고 하는 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전생에 자신이 지은 죄가 다 비쳐 보인다고 해서 저는 그 개심사 갈 적마다 그곳에 제 얼굴을 들이밀곤 합니다. 아둑서니라서일까요 죄나 업보는 보이지 않고 다만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이라는 시가 떠오르곤 합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추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어 섰을 뿐이다.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명부전까지 가면 대부분 절 감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돌아가기 쉬운데 저는 산신각으로 오르는 둔덕에 꼭 오르곤 합니다. 외따로 떨어져 놓치기 쉬운 이곳에 서면 산에 포옥 잠긴 듯 안겨있는 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조촐하고 시원한 눈 맛이 참 좋습니다. 절집은 아득하고 고즈넉할수록 좋은 듯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사는 끌탕의 세속 간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차원의 삶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어쩌면 잊고 있었을지 모르는 존재 본연의 삶으로 귀환할 수 있는 '걸어 나옴', '들어 올림', 그리고 비로소 '고요해짐'을 위해선 자신의 심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서늘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수영장에 갔을 때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물이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물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온몸에 힘을 주었고, 번번이 고개를 들어 물을 먹기 일쑤였습니다. 꼬르륵거리며 수영장 바닥까지 내려갈 때 모든 침잠하는 것이 주는 막막함에 허우적거리다 더욱 깊이 빠져들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러나 제가 물을 믿고 몸을 맡기었을 때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내 발걸음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막막함 속에 찾아갔던 개심사 가는 길이 어느새 삶에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순간마다 찾아가는 중요한 모태 공간이 된 것처럼, 처음엔 어설프고 낯선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하고 소중한 것으로 잠겨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늦은 시작을 이유로 몸 사리며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배목걸새로 수기수기 잠갔던 마음을 열고, 오랫동안 가라앉아 녹슨 발굽을 일으켜 개심사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개심사에 다녀오는 날엔 마음을 씻어 어둡고 눅눅했던 기운을 조금 떨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음을 열어 당신에게도 세상에게도 한 걸음 내딛지 않을까요. 그저 다녀온다는 것만으로 이미 저는 하나의 용기를 가진 게 되지 않을까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개심사 다녀오신 적 있으세요? 저랑 개심사 같이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