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별주의의 문제
점심을 먹고도 배가 고픈 고3 남학생들이랑 편의점을 탈탈 털고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가 프랑스 문학으로 빠졌는데 자기들도 좀 안다며 작가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보들레르, 모파상, 프란시스 잠, 에밀 졸라, 까뮈, 알퐁스 도데, 생 떽쥐베리, 기욤 뮈소, 베르나르 베르베르..
“우와, 역시 문학소년 맞네.”
“촌스럽게 문학소년이 뭐예요. 세계사 시간에 작가와 작품 이름만 배웠어요. 시험 보느라 달달 외웠더니 까먹지도 않네요. 기욤 뮈소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명한 동시대 작가라 읽은 거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면서도 어깨가 우쭐 솟아 있다. (귀엽다)
“근데 뭐 별거 없던데요!”
다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라는 것.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결론이 너무 명쾌하게 나오는 것이 어찌 심상찮다. 가령 알퐁스 도데 ‘별’은 양치기가 주인집 아가씨 후리는 이야기란다.
그 아름다운 밤의 이야기를 단지 양치기가 주인집 아가씨 후리는 걸로 정리하다니.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었어도 잔재가 남아있어 신분이 낮은 양치기가 주인집 딸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사회구조였다. 양치기를 찾아온 건 주인집 아가씨였고, 작품 내내 양치기는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고, 자신에게 우연히 찾아든 소중한 존재인 아가씨의 보호를 자처하는 모습이다. 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양치기 소년의 사색이 깊다. 문학을 시험 대비로 공부하는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문학이 다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라는 말은 얼마나 서늘한 말인가. 얼마 전 고전시가를 가르치다가 고2 여학생이 고전시가는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자연 좋아, 임금 좋아 너무 뻔해요라고 말해서 놀랐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문 가객들의 유산가와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이현보의 어부가와 박인로의 누항사가 어떻게 한 쾌에 꿰일 수가 있을까. 씀바귀와 애기똥풀과 고들빼기를 그렇고 그런 들꽃이라 할 수 없듯이.
학습에선 수렴적 사고가 가성비가 좋다. 그러나 모두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순간 개별 작품의 특성과 생명력은 반감되고 박제된다. 지나친 필터링 과정에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개별적 자질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학습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이러한 사고는 어른이 되면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 그게 그거야, 별 수 있겠어, 그놈이 그놈이지… 차이와 차이의 정도를 인정하지 않는 무별주의라 할 수 있는 이런 태도는 명백히 구별해야 할 사안을 얼버무리고 희석화시킴으로써 쟁점의 표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성실히 반듯하게 살아가는 일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다. 더 나아가 나쁜 악에 대해 묵과하게 되고 심지어 적반하장을 용인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다 그렇고 그렇다고 살아보니 인생 별 거 없다고 아이한테 쉬이 말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