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삶을 산 지 4개월이 지났다. 지난 4개월간의 변화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불안하긴 한데 그보다 더 편하고 행복하다.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작고 영세하면서 일은 많은 중소기업에서 일 한 나로서는 일에 대한 부담과 모든 것을 책임지고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음만으로 삶의 질이 올라갔다. 무엇보다 회사가 아니라, 나의 미래를 위해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 불안을 상쇄시켜주지는 않는다. 행복이 더 커서, 불안을 견디는 것일 뿐..
퇴사하고 한 달 만에 뮤지컬협회에서 주관하는 멘토링 사업에 선정 돼 장유정 작가/연출님과 멘토링을 시작했다. 나의 작품을 최고의 작가님과 멘토링을 통해 개발할 수 있음은 무한한 영광이지만, 프로패셔널의 길은 정말 혹독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회사에 몸 담고 있으면서 작품을 기획하고 창작할 때는 핑계를 댈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핑계를 댈 수 없다. 뮤지컬 극작가가 되고 싶어서, 프로패셔널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니까. "저 그런거 몰라요", "해 본 적이 없어서요."같은 핑계는 이제 저 멀리 안녕이다. 어떻게든 해 내는게 프로패셔널의 세계다.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프로 작가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애매한 경계에서 지난 4개월간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나날들을 보냈다. 회사에 묶이는 건 정말 싫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주는 안정감은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 백수가 되고 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됐지만, 그것을 효율적으로 쓰기란 쉽지는 않았다. 멘토링을 하면서 멘토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내 작품을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일정의 자유를 얻으면서 높아진 삶의 질은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힘든 것은 마음은 굴뚝인데 아직 부족한 내 자신이다. 결국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전문적인 극작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무대예술 쪽 전공도 아닌 내가 프로패셔널들을 쫓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리 각오는 한 바였지만 자존감이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같이 멘토링을 하는 멘티 언니는 올 해 서른이다. 공연 쪽 일은 늦게 시작을 했다길래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이 멘토링을 하면서 그녀에게는 탤런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개인작품 멘토링을 하면 스스로 비교가 되고, 그녀에 비해 전문성도 떨어지고 뮤지컬 문법이 익숙치 않는 나는 위축됐다. 이제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제가 처음이라서요."같은 소리는 입밖에 내서도 안 된다. 방법은 하나다. 부족한 부분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서 고쳐나가는 수 밖에.
처음에는 바닥을 치는 자존감에 많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마음을 좀 바꿔먹었다. 아직 서툴고 부족한 나를 귀여워 할 줄 알게 됐다. "아유 귀여워. 이렇게 작고 하찮으니 자라서 뭐가 돼도 될 수 있겠지." 멘토링을 하는 기간이 나에게는 쑥쑥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단 나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멘토님께도 당당하게 요구한다. 고치는 건 내가 밤을 새서라도 고쳐올테니, 한 번만 더 봐달라고. 워낙 바쁘신 분이라 시간을 빼서 한 번 더 봐달라고 하는 것도 사실 죄송하다. 그래도 어떡해. 내가 기댈 곳은 멘토님 뿐인데. 감사하게 멘토님께서도 바쁜 와중에도 신경써 주시고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한참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 이걸로 내가 먹고 살기는 힘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백수로서 최대의 불안이다. 준비하는 일이, 나를 먹여살려주지 못할거라는 불안. 물론 프로젝트에는 최선을 다 할거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이 분야에 재능이 있는걸까에 대한 물음이 끝없이 생겨났다. 그런 와중에 내가 지금 백수라는 현실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래도, 참 즐겁다. 그게 무서운 점이다. 힘들고 어렵고 불안한데, 그래도 즐거우니까. 게다가 아직은 배우는 중이니까. 이 배움을 토대로 정말로 크게 성장할 수 있게, 지금은 자양분을 맘껏 받아들일 때다. 배우는데 정도가 있나. 그냥 부딪히면서 배우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