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숙명
부모라는 이름이 주는 숙명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자식의 숙명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식에게 주어진 가장 가혹한 숙명은 부모를 닮는다는 점이다. 특히 딸은 엄마를 닮는다. 방법과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닮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엄마들은 주로 딸에게 반면교사가 되곤 한다. 인정하고싶지 않은 너무나도 솔직한 내 미래의 모습이기도 해서, 다른 어떤 인생선배보다 더 짜게 평가하게 되는 존재가 바로 엄마다.
나 역시 김여사가 세상 누구보다 존경스러운 인생선배지만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는 반면교사가 되곤 한다. 그리고 김여사 역시 오여사(외할머니)를 보며 늘 그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오여사로 말할 것 같으면 말싸움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여장부다. 키도 작고(내가 작은건 오여사로부터 김여사를 거쳐 내려온 유전자의 저주 같은거다), 웃고 있으면 그저 해맑은 할머니에 불과한데, 오여사의 신경을 건드리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무대뽀 정신에 우기기 기능, 다채로운 육두문자까지 탑재한 오여사는 종종 이유도 없이 욱하고 터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곤 했다.
오여사의 일생은 영화 속에서 만나보던 그런 '기구한 여인'의 전형이다. 아이 셋을 낳자마자 알콜중독 남편은 요절했고, 세 남매를 홀몸으로 키우기 위해 식당, 방문판매, 공사장 일,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세 자식이 모두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기 시작할무렵 오여사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조금 편안하게 사는 듯 했으나, 나와 내 동생을 키우느라 또 한 번 그녀의 허리가 굽었다. 김여사는 나에게 친구같은 엄마라면, 오여사는 나에게 할머니같은 엄마다.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탓일까 그녀는 몸에 화가 많다. 그녀를 눌러 온 세월의 무게는 뜨거운 불덩어리도 함께 그녀의 가슴 속에 쌓아갔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야 아무것도 아닌일에 그녀의 가슴은 폭발해서, 주변사람들에게 그 뜨거운 불덩어리를 던져댔다. 그 불덩어리에 가장 많이 맞은 것도 다름아닌 김여사였다.
모녀란 참 이상한 관계다. 가장 소중하면서도 또 가장 쉽게 생각하게되는 존재. 아들 둘은 타지에 보내고 유일하게 살 붙이고 지내며 누구보다 오여사를 챙기는 김여사에게 오여사는 시도 때도 없이 폭발했다. 너무 가까우면 독이 된다고, 김여사는 누구보다 오여사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풍을 맞고 쓰러지기 전까지, 김여사는 거의 매일을 오여사의 식습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잔소리를 했고 오여사는 그걸 자식의 사랑이나 걱정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았다.
오여사는 김여사보다는 손녀인 나에게 약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덩이가 오가면 중재는 나의 몫이였다. 두 사람 모두 먼저 고개를 숙여 줄 위인들이 아니었기에 나는 괴로웠다. 오여사에게는 나를 봐서라도 할머니가 기분 풀라고 했고, 김여사에게는 엄마의 엄마니까 엄마가 이해해달라고 했다. 몇 번은 정말 모녀가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는 파국으로 이어질 뻔 했다.
늙어서 저렇게 될까봐 겁난다. 김여사가 오여사를 보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김여사 말을 빌리자면)저렇게 남들 괴롭히면서는 살지 않겠다. 김여사의 다짐에도 무색하게, 손녀와 딸 된 내 입장에서 보자면 김여사는 점점 오여사를 닮아가고 있다.
아니, 사실은 이전부터 꽤 닮았다. 둘의 성격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달라도, 오여사로부터 전해진 어떠한 기질은 오래전부터 김여사의 몸 속에 있었다. 그리고 김여사의 딸인 나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요즘 오여사와 김여사를 보면 마음이 심란하다. 나도 나이가 들고 갱년기가 오면 저렇게 될까. 되겠지. 숙명이니까. 거절해도 소용이 없겠지.
너무 사랑하지만 모든 것을 닮고 싶지는 않은 사람. 하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닮아가게 되는 사람(그것도 가장 싫은 부분부터). 그게 바로 엄마라는 사람인가보다.
아빠가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하는 날이 잦아진다.
엄마 점점 외할머니랑 똑같아지는거 같어.
내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김여사가 돌아봤다.
비겁하지만 나는 조용히 눈을 피했다.
당신 지금 뭐라그랬어?
아무 말도 안했어.
나를 누구랑 비교하는거야! 엄마에 비하면 나는 순한 양이지!
순한 양은 점점 날카로운 호랑이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