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새벽일기

서울 살이 몇 핸가요 2

제 2의 고향, 왕십리

by 글쓰는 최집사

서울에 '내 집'이 없는 사람으로서, 서울이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다.

'고향이 서울이라니. 얼마나 재미 없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인데, 그래도 이 나라에서 서울에 내 집이 있다는 건 정말 큰 메리트니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서울에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있다. 4년 동안 살았던 왕십리다.

집도 집이지만 대학생활을 왕십리에서 한 덕에, 서울에서 다른 곳은 몰라도 왕십리만큼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식당과 가게가 월세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 바뀌는 모양이지만.


왕십리에서의 얻은 첫 원룸은 내 인생의 첫 자취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년 월세를 냈다는게 아깝지만, 당시에 왕십리에는 전세를 찾기 어려웠고, 엄마는 가격보다도 내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저렴하게 한 끼 때우기 좋은 밥 집으로 알려져 인산인해를 이루는 밥 집 바로 맞은 편, 나의 첫 자취방이 있었다. 공동현관 열쇠가 있고, 보안 cctv가 달려있고, 복도에도 카메라가 있는 3층이었다.

6평. 크기는 알만 했다. 엄마는 처음 그 집을 보고 이건 너무 작은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그리고 근방에 다른 방들을 돌아보고 나서, 그보다 큰 원룸을 구하려면 월세를 50만원 이상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대학교 2학년, 학생회 2개에, 과외까지 서 너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집의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생긴 나만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학교 앞이라니.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 없다. 원룸은 신축이었고, 조금 작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불편한 점도 없었다.

그 집은 때로는 친구와 함께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우는 심야식당이 되고, 술 취한 후배의 쉼터가 되기도 하고, 편한 차림으로 홀로 밤 새 연달아 영화를 보는 영화관이 되기도 했다.

왕십리에서의 첫 집은 내가 살았던 집 중 가장 작은 집이었다. 그 집에서 동생 입시 면접 전 날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 잤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놀랍다.


첫 원룸에서는 2년을 지냈다. 2년 뒤 계약은 만료되었고, 다만 얼마라도 월세를 올려야 한다는 말에 집을 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아직 2년이 남아있었고, 서울에 집이 없는 민달팽이 신세니 다른 집을 구해야 했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했다. 동생이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 것이다.

새 집을 구하던 해는 동생이 대학생이 되던 해였다. 하지만 동생은 신입생 시절을 기숙사에 강제로 발묶여 지내야 했기 때문에, 집을 구하기가 애매했다. 다음 해에는 동생이 서울에서 통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투룸을 구하는 것이 맞았지만, 어쨌든 1년은 나 혼자 살아야 하는 집이었기에 고민이 많았다.


솔로몬 엄마는 뜻 밖의 해결책을 내 놓았다. 서울로 단기 발령을 신청한 것이다. 1년간 엄마와의 동거가 확정되었을 때, 사실 마냥 좋지는 않았다.

혼자인 서울살이가 외로웠고, 엄마와 고향 집이 그리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엄마랑 같이 살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건 엄밀히 다른 문제였으므로.

뜻밖에도 엄마와의 1년은 매우 즐거웠다. 나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외로운 서울 살이에 엄마라는 존재가 있다는 건 큰 위안이었다. 종종 함께 식사를 하고, 내 걱정을 해주고, 여름에는 수영장을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말도 안되는 사이즈의 바퀴벌레가 출몰했던 그 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엄마 덕이었다.


사이즈가 잘 나온 그 투룸의 유일무이한 단점은 반지하라는 사실이었다. 반지하는 무조건 피하는게 상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집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채광이 적기는 해도 나름대로 환기도 잘 되고 방과 화장실 크기도 좋았다. 나중에 동생과 함께 살게 되더라도 나쁘지 않은 사이즈였다.

정작 살아보니 단점은 반지하라는 사실이 아니라, 건물 외부 방역을 하면 매미만한 야생 바퀴벌레가 지하로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벌레 공포증이 있는 나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크기의 바퀴벌레에 기절초풍했고, 엄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녀석을 잡았지만 그건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오밤중에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나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불을 다 켜놓고 잠에 들어거나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매미만 한 바퀴벌레'라는 엄마와 나의 말을 믿지 않던 동생 역시 실체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미만한 바퀴벌레의 출몰과, 건물 관리자였던 부동산 사장님의 암을 유발하는 태도로 왕십리 두번째 집에서의 2년은 괴로웠다.


서울살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사하는 날이 설렜던 건.

왕십리 투룸에서 직장 근처로 집을 옮기면서는 하루 빨리 이사를 하고싶은 마음에 두근거렸다. 다만, 왕십리를 떠나는 것 만큼은 속상하고 아쉬웠다. 서울살이의 기반은 대학생활이었고, 대학생활의 기반은 왕십리었다. 나의 20대 초반을 함께 한 공간이라는 건, 정말 특별하다. 어린날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긴 공간이고, 대학시절의 추억이, 나의 첫 20대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이다.


지금도 대학 친구들을 만날 때는 왕십리로 간다. 갈 때마다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골이었던 가게가 문을 닫은 걸 보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새로운 맛집을 찾으면 그렇게 기쁘다.

서울에서 내가 왕십리보다 잘 아는 곳이 있을까, 물어보면 당연히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고 몸에 익어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왕십리의 어느 곳이든 그 풍경과 냄새까지 그대로 살아나는 느낌. 그 점이 왕십리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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