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되면 다가올 새로운 한 해를 위해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었다. 새해가 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곧 작심삼일이라는 공포스러운 단어의 위엄 앞에 허우적댔다.
늘 있던 일인지라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그간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계획을 세우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더 그렇다. 심하게 게을러진 거다.
계획 없이 빈둥빈둥 의식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갑자기 게을러진 것이 아니라 게으른 나를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지고 흐릿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쿵쾅쿵쾅 나대던 심장이 느릿느릿 뛴다. 뭔가에 쫓기듯 허둥대던 발이 어슬렁거리고 뭔가를 하고 있어야만 편했던 마음 시계가 느긋해졌다.
게을러지기로 마음먹고 난 이후의 변화다. 아니, 본래 게으른 나를 인정하고 난 이후의 증세다.
나는 올 한 해 게으르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졸리면 아무 때나 자고 피곤하면 누워 쉰다. 하는 일 없이 생각 없이 누워서 뒹굴뒹굴 멍석놀이하는 나를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내버려 둔다. 게으르게 살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조급함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한가한 자신을 용납하지 않고 열심을 내었던 것은 분에 넘치는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몸도 마음도 힘에 겨워 감당이 안 되니 그제야 욕심이라는 바위에 짓눌려있는 내가 보였다.
나는 욕심의 바위밑에서 가까스로 숨 쉬고 있는 나를 꺼내어 주기로 했다.
이제 나는 욕심의 노예가 아니다. 한가하고 여유 있는 자유로운 주인이다. 자기 계발이니 노년의 꿈이니 인생 삼모작이니 하는 단어들에 휩쓸려 무분별하게 스스로를 내몰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둘레길을 걸으며 산공기를 들이마신다. 내 안에 머물렀던 욕심덩어리가 빠져나간다. 뭘 하든 재미있어서, 좋아서, 편해서 그냥 하리라 마음먹는다.
즐겁고 재미있다는 사실이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공자는 나이 육십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 했는 데 나는 귀보다는 마음이 순해진 것 같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는 게 재미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인정하리라 마음먹은 이후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운 사람이 없다. 분에 넘치는 꿈은 꿈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깨달음이 머리와 심장을 쉬게 한다.
죄책감 없는 '쉼'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지친 나를 내버려 둔다. 편안한 내가 참 좋다.
먼지 낀 창틀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루주 묻은 커피잔과 물얼룩 범벅인 읽다만 소설책.
그 옆에서 큰 대자로 누워 하품하는 나.
게으름의 나긋나긋한 매력이다.
아니, 게으름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