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유세 / 박지영
지난 가을부터 얹혀 살던 무일푼 세입자
새벽녘 부푼 방광을 비우려 들어선 화장실에
초대받지 않은 그 아이 누워있었지
타일바닥이 얼음장인데 저 아이는 왜 저러고 있을까
어떤 날은 세면대 아래 어떤 날은 세탁기 발치에서
뿔 달린 사슴을 흉내 내고 있었지
밟힐까 조심스러워 덜 깬 눈 부릅뜨다가
혹시 몰라 24시간 Led등 밝혀놓았다
졸린 눈 비비며 들어선 화장실 바닥에서
어느날 똥 덩어리 한 개 보았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어? 누가 변기 밖에다 똥을 흘렸니?)
휴지 말아 집어 들려다가 돌돌 말린 민달팽이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신경 쓰여 한마디 했지
(이놈의 똥 덩어리 때문에 성가셔서 못 살겠네)
새벽 3시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었지
화장실 문턱을 넘으려 안간힘 쓰는 세입자
모르는 척 그냥 나와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지
저 들으라고 한 말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 그 아이 보이질 않네
-작년 가을 민달팽이가 우리집에 출몰했었다.
가진 것이라곤 미끈거리는 몸둥이 하나
마치 바들바들 떨고있는 듯 보이던 민달팽이...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내심 신경쓰이던 민달팽이.
사람이나 달팽이나 집 없는 설움은 비슷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