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인수(我田引水) 역할놀이 / 박지영
man이 있어서 woman이 생긴 거라고 아빠가 말한다
male은 female에서 떨구어진 부스러기라고 엄마가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주체적인 단어라고 아들이 말한다
밭에서 힘쓰는 남자(男子),
손을 오므린 조신한 여자(女子)
시대에 덜 떨어진 한자라고 딸이 말한다
리포터는 ‘행복해진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이 가능해졌다고 알려준다
아빠는 티브이를 끄고 엄마는 유튜브를 검색한다
아들을 고개를 끄덕이고
딸은 기도를 한다
웨딩드레스 두 여자와 바지정장 두 남자
부부 중 한 사람은 분명 이성을 닮았다
한 여자와 남자 같은 한 여자, 한 남자와 여자 같은 한 남자
부부가 어째 완벽한 동성이 아닌 겉모습이 껄끄럽다고
아빠와 엄마와 아들과 딸이 중얼거린다
누군가 한 사람은 이성인 체 해야 하는 동성의 세계
아무도 시키지 않는 성적 분담을 스스로 하는 동성의 나라
그 곳에서도 이성의 역할은 필요한가보다고 다들 중얼거린다
동성이면 어떻고 이성이면 어떻고 심지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떠냐고 할머니가 말한다
죽으면 썩어질 몸뚱어리 어여 잠이나 자라고
평생 혼자 사신 할머니가 유복자 아버지에게 소리치신다
미국 갈 일 없는 아빠는 밤새 영어단어를 외우고
프랑스가 어디 붙었는지 모르는 엄마는 밤새 샹송을 듣는다
드디어 세상은 진보했다고
아들은 흡족해하며 뉴스를 다시 켠다
딸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흐느낀다
허벅지 애무 중이던 모기 주둥이 내려치는 할머니 손바닥이 철썩~
할머니를 사랑했던 모기는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너무 더워서 머리가 하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