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는 어디서든 흔하게 마주치는 새 인지라 신기하게 바라본 적은 없지만, 그 새를 마주칠 때마다 내게는 오랜 버릇이 있다. 우선 그의 발을 보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작고 빨간 두 발을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두 발이 정상적이지 않은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한쪽 발이 일부 뭉개져 있거나 날아가 버렸거나 뭐 그런 식이다.
어제도 길을 가다가 평범한 비둘기 한 마리와 마주쳤다. 습관적으로 비둘기의 발가락을 살펴보던 나는 평소보다 심각한 상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발 한쪽이 노랗고 가는 노끈으로 칭칭 감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심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노끈만 제거해 주면 금세 회복할 듯 보였지만 비둘기를 잡을 수는 없는지라 안타깝기만 했다. 살아있는 비둘기는커녕 죽은 닭도 만지는 게 싫어 백숙이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주문을 못 들은 척 외면할 때가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절뚝이며 제자리를 맴도는 비둘기를 지나쳐 집으로 왔다. 절뚝거리는 비둘기와 노끈이 잔영처럼 남아 찜찜했다. 노끈만 풀어주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둘기 한 마리 구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안녕'이 걱정되는 내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의 나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난 감상적 센티언티스트 (Sentientist)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는 안타깝지만 돌아서면 잊고 마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착한 감정'? 그나마 잡아먹고 나서 눈물 흘리는 악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뭔가 직접적인 행동까지 가지 못하는 소심한 '감상주의자'를 일컫는 '자기 위안'의 단어가 아닐까 싶다. 비둘기를 구할 방법도 의사도 없지만, 어디선가 노끈으로 인해 괴로워할 비둘기가 걱정되지만 직접적인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착한 마음인 것이다.
곧 해가 솟아오를 것이고 난 이런저런 일과를 위해 바쁘게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길에서 마주치는 비둘기들의 발가락이 무사한지, 왜 이렇게 잘리고 구부러진 발가락을 가진 비둘기가 많은지 궁금해할 것이다.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비둘기를 마주치면 그 비둘기가 맞게 된 '생로병사' 중 마지막 과정인 '죽음'에 대해 잠시 심각한 감상에 빠질 것이다. 내친김에 언젠가는 닥쳐 올 '지구의 마지막'에 관한 우려로 혀를 찰 것이다. 끝으로 한참 기다리게 만든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를 못마땅한 듯 살짝 째려보다가 투덜거리며 내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비둘기의 잔영으로 잠시 괴롭겠지만 곧 비둘기의 죽음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잠자리에 들 것이다.
가끔 생명에 관한 연민으로 가득한 나는 엊그제 겁에 질려 때려죽인 벌레 한 마리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생명과 나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의 대상인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인지에 관한 물음.
내가 먹는 죄 없는 짐승의 희생은 누가 허락한 것인가에 관한 물음.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과연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아름다운 것' 인가에 관한 물음
왜 나는 자꾸 비둘기의 발가락이 궁금한 것인가에 관한 물음.
궁금하면서도 답을 찾거나 답대로 사는 것에는 자신 없는... 솔직히 모르겠다.
비둘기가 준 하얀 망상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나의 '이기적인 선'과 '움직이고 싶지 않은 양심'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므로... 나는 또 오늘 하루의 일정표를 훑어본다. 바쁘게 사는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나이에 이런 유의 고민과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든다는 건 거추장스러운 일이라고 머리를 저으면서...
답답하고 부끄러운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