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어로 '의식 확장', 조금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깨달음', 본질의 언어로는 '기억이 돌아옴'이라고 표현하겠다. 그 과정 동안 꽤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나'라고 여겨온 시선의 창과, '너'라고 여겨온 세상의 모든 것들은 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은 좀처럼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엔 벅찼다. 까만지도 하얀지도 몰랐던 안개가 걷히고 나자, 그 너머가 생생히 보이는듯한 감각. 결계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처럼, 자각에 대한 열망은 끝이 없었다. 하나를 알면 그것에 대한 물음표가 3개 이상은 떠올랐다. 모든 것에서 본질을 찾으려 했다. 근원의 생각들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다.
이후에는 꽤 해탈했다. '허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더는 혐오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됐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 그만큼 지구가 주는 생생한 체험에 대한 의미는 사라지고 있었다. 보이고, 들리고, 맡아지고,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당연하게 잠을 잤다. 지루했다. 그 어떤 소식도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내게 '정체와 고요'의 순간이었다.
그 시기쯤 꽤 독한 감기에 걸렸다. 2년 남짓 걸리지 않다가 찾아온 감기는 내 기억보다 강한 녀석이었다. 그 통증은 아직도 여기가 환상처럼 느껴지냐는 듯 나를 다그쳤다. 관념론을 체화한 네가, 이 통증마저 초월할 수 있냐는 듯, 생생히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감기를 이겨내기 위해 먹었던 음식은 싱싱했고, 휴식을 위해 누워있던 침대는 푹신했으며,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몸 안의 바이러스들은 다시 3차원의 레이어로 나를 접속시켰다. 그동안 뭘 쫓고 살았던 건지 사유하고, 다른 차원의 나와 소통하기 위해 육체를 잠시 뒤로 미루었던 스스로를 돌아봤다.
많은 이들이 존재에 대해 궁극적 물음표를 던지고 근원을 부르는 요즘, 이전 시대에 비해 이러한 얘기들은 덜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감사하게도) 이 글을 읽듯이, 어느 플랫폼을 가도 근원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메시지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깨달음은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여정이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고, 깨달은 사람은 지혜로운 현자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다.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는 외롭지 않을 뿐이다. 굳이 날을 세우지 않을 뿐이다. 그대는 또 다른 나의 형상이자, 내 스승이니.
진실을 '안다는 것'과 그 진실을 '함께 살아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는 매일 명상을 하진 않으며, 채식주의자 또한 아니기에 가끔은 육류를 섭취한다. 대신 자기 전 하루를 돌아보고 얻은 것을 곱씹으며, 생생한 체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해 준 모든 의식체에 깊은 마음으로 감사를 표한다.
진리를 기억해 냈다고 뭐 어떡할 것인가. 당장 고향별에 갈 수도 없고, 자유롭게 우주를 유영할 수도 없다. 지구를 이해하고 체험하기 위해 이 곳에 왔으니, 이 별이 주는 에너지와 사랑을 온전히 느끼다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삶의 태도이자 스스로의 선택과 지구에 대한 존중이라고 느낀다.
우주 생각의 일부이자 지구라는 의식체 속에서 기꺼이 주어진 환상을 온전히 겪는 것.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장도 보면서 소박함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이곳에 온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