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P는 연애 최악형? 누가 그래요?

이해하는 도구에서 분류하는 도구로

by 본담


연애하기 가장 꺼려지는 MBTI로 ESTP가 선정됐다. 이유는 본능에 충실하고, 도파민 중독이며, 이기적이라는 것. 이러한 결과를 보고 ESTP인 내 지인은 야유했다. "대체 무슨 근거야? 내가 얼마나 연인한테 잘하는데!"


실제로 내가 아는 이 친구(이하 A)는 애인에게 참 잘했다. 다정하고 섬세했으며,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A는 소개팅이 주선됐을 때도 본인의 MBTI를 듣고 상대방이 주저한다는 주선자의 연락까지 받았다. 그녀는 말했다. "대체 ESTP가 연애할 때 최악이라는 근거는 누가 정한 거야?"




며칠 뒤 꽤 쌀쌀했던 어느 날, 웹 서핑을 하다 또다시 내 이목을 끈 MBTI 관련 글을 보게 됐다. 내용은 이러했다. '본인은 ENTP지만, INFJ 유형이 뭔가 '있어 보여서' 사람들에게는 INFJ라고 본인을 소개한다'는 글이었다. 많은 사람이 댓글로 웃음을 표했지만, 내 안에는 감출 수 없는 물음표가 떠오르고 있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막 확산할 무렵, 우리는 본인과 타인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 MBTI를 기꺼이 유행이라는 문화로 들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를, '배제하고 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문득 이러한 사유를 했다. 'ESTP, INFP, ENFJ···.' 인간의 유형을 고작 16개로 쪼개어 테이블에 펼쳐 놓고, "이건 연애에 최적화된 유형, 이건 회피형, 이건 감정 기복이 심한 유형"이라고 써 붙인 것 같다는 오싹한 느낌. 고작 네 글자로 이루어진 알파벳에 기대어 타인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사랑'마저 걸러내기 시작한 현상. '이건 단순한 놀이인가, 아니면 다시 시작된 '또 다른 형태의 우생학'의 시대인가?'




1900년대 초, 인류가 퇴화하지 않으려면 '부적합자'들의 유전자를 소멸해야 한다는 의지가 점령하던 시절.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 될 경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 불임 수술이 강행되던 시절.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집에 남아있던 아내와 딸이 "남자가 없는 집에 여자만 있는 것은 매춘굴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강제로 끌려가 불임 수술을 받던 시절. 부모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본인의 집'에서 형제들과 놀고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끌려가 부적합성 진단을 받던 시절.


부적합자들이 인류를 퇴화시킨다는 왜곡된 신념 하나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모조리 앗아가고 짓밟아버린 피의 시절. 우생학이라는 이름으로, 본인들이 정한 구조의 피라미드가 붕괴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기준 없는 기준을 정해 타인의 희망을 뭉개버리던 시절.


그 끔찍한 시대가, 관념이, 짧은 찰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 시대의 서막 또한 처음부터 피로 젖지 않았으니. 두려움에서 파생된 판단으로부터 시작됐으니 말이다.




나는 INFJ 유형을 결과로 '진단'받은 사람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줄 알며, 매 순간 공상에 잠기지도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 성향이고, 즉흥이 주는 깜짝선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되는 성향인 INFJ가 나왔다. 과연 내가 진정한 INFJ 유형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판단은 우리를 철저히 분리시킨다. 공포에 떨게 하고 방어하게 만든다. 특정 유형이 본인과 맞지 않는 성향이라고 필사적으로 구분 짓는 요즘처럼. 특정 성향이 인류를 퇴화시킨다는 믿음으로 인권을 약탈했던 과거처럼.


두려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 더 나아가서는 '느끼는 것'. 언어와 잣대가 방어막으로 꽁꽁 규정한 '정체성'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투명해진 더욱 본질적인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언어 너머의 울림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은, '이해'를 가장 깊이 이룰 수 있는 방식이다. 분류가 아닌, 공명으로.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흐름에 들인 MBTI라는 문화이자 도구를 가장 현명히 사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현재의 우리들만큼은, 분류라는 이름 아래 판단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오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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