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나를 달래는 방법
나는 언니와 4살 차이가 난다. 동생이라면 흔히들 그러겠지만 언니가 하는 건 항상 예뻐 보이고, 더 좋아 보였다. 언니가 성년의 날 선물로 엄마와 종로에 가서 금반지를 사서 끼고 왔을 때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고 뭔가 의미가 잔뜩 담긴 선물 같았다. 나는 언니의 금반지가 엄마가 언니에게만 준 특별하고 큰 마음이 담긴 물건이라 느껴졌다. 어린 마음에 나도 가지고 싶다고 떼를 썼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너도 성년의 날에 사달라고 해."라는 말이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도 그때가 되면 얻을 수 있겠지 싶었다.
내가 첫 성년의 날을 맞이했을 때 엄마가 여러 일로 이래저래 바쁘셨다. 그래서 난 언니가 성년의 날에 받은 그 특별하고 소중한 금반지를 '선물'받지 못한 것이 꽤나 오래 섭섭했다. 결국 몇 번을 울고 서운함을 표현한 뒤 엄마와 종로에 가서 금반지를 얻어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과정이 순탄치는 못했지만 나도 우리 엄마가 '선물'해준 '나의 금반지'가 생겼다는 것이 참 행복했다.
그렇게 금반지를 왼손 검지에 끼고 나서 괜히 자신감이 생겼다. 엄마가 준 특별한 반지를 낀 내가 너무 좋았다. 물건을 특별히 잃어버리는 성격도 아니라 몇 년을 그렇게 잘 끼다가, 일이 생겼다.
지구과학 수업으로 건물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던 날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망원경을 통해 본 달은 생각보다 더 밝았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는 달에 나와 친구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옥상 난간을 손으로 잡다가 옥상 벽 시멘트에 반지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반지 한쪽이 거친 시멘트 면에 긁혀 깊게 스크래치가 났다. 정말 짜증 났다.
나는 좀 내 물건에 예민한 편이었는데 설명하자면 이런 모습이었다.
문제집을 절대 구기거나 접지 않고 끝까지 풀었다. 친구들이 일부러 장난처럼 내 종이를 접으려고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물건을 새로 살 때는 진열되어 있는 모든 물건을 살펴보고 가장 깨끗한지, 실밥이 빠져나와있지 않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구입했다. 전자제품에 흠집이 생기면 내 마음도 흠집난 것처럼 아팠다. 내 필기노트에는 내 글씨만 적혀야 하고, 낙서하는 것은 용납이 안됐다.
그러던 중 내 소중한 반지에 생긴 스크래치는 순식간에 내 마음을 바닥으로 던져버리는데 충분했다. 옆에 있던 친구에게 바로 속상함을 이야기하고 반지를 만져보다가 갑자기, 진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달을 보면서 생긴 스크래치..?"
다른 것도 아니고 달을 보면서 생긴 스크래치라니. 좀 멋있었다. 그래서 반지의 흠집을 계속 만지는 것 대신에 내 마음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달을 보다가 소중한 반지에 생긴 스크래치는 좋은 의미일 거야. 내가 언제 또 달을 보겠어? 달을 보던 날을 기념하려고 반지에 각인 새긴 걸로 할까?'
이 날을 시작으로 나는 예민한 나를 달래는 방법을 찾았다. 예전처럼 흠집이나 더러운 자국에 스트레스받는 대신, 그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새로 산 아이폰에 있던 흠집, 이케아에서 데려온 코끼리 인형 코에 실밥이 풀려있던 것, 언니가 사준 비싼 지갑의 얼룩들 모두 내 물건임을 알려주는 추억이자 표식인 것으로.
그래서 이제는 금방 마음이 괜찮아진다. 새로 산 물건에 흠집이 있어도, 소중한 물건이 조금 더러워지거나 어딘가 깨지더라도.
물건보다 내 마음이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이제는 안다. 언젠가 성묘를 갔다 오며 내 손가락에서 쑥 빠져 사라진 스크래치 난 그 반지처럼. 잃어버림 또한 소중한 기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