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인생 사계)

기억 속으로

by Grace k

이민와서 25년,

한 동네에서 산 수가 스무 해 가까워진다.

벚꽃이 피고 목련이 잎을 틔우면 봄이 온다.
서서히 물이 올라 짙어지는 녹음 아래서
피톤치드의 향을 들이켜면 여름 속이다.
단풍이 물들어 캐나다의 상징 같은
빨간 잎들이 문신처럼 파고들면 가을이다.

이민을 하더라도
비에 젖는 밴쿠버, 그 을씨년스러움은
피하고 싶어지는 겨울이 사계의 끝이다.

그렇게 한 곳에서 꽃피고 지는 봄,
천당아래 999당이라는 아름다운 여름,
단풍에 취하는 가을,
비에 얼어붙는 겨울을
열여덟 번째 맞는다.

아이들의 키가 자라서 나보다
훌쩍 커지는 걸 보며 10년쯤
지난 세월의 시점을 가늠했었다.
훅 돌이키니 엄마는 아이 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작은 노인이 되어가는 요즘이다.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늘 강해야 했다.
아니, 그런 척하는 인간으로
이만큼 와 있다는 사실이,
한 번씩 깊은 꿈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나를 놀라게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안에
내 시간이 녹아있다.

잘 익힌 담금주도 18년이면 숙성의 깊이가
다를 테다.
내 인생을 더듬어 보는 자리이다.
내가 사랑하는 동네의 풍경만큼,
잘 어우러져서 풍미를 내면 좋을 테다.

"에이, 실패했잖아. 이건 못 먹어"
이럴 정도만 아니어도 다행이다 싶은 건
솔직한 속내이다.

나를 깨우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는
요즈음이 소중하다.
급발진하던 나를 멈춰 세우기도 하고,
이젠 조심히 가라고 등 밀어주는
시간이 되어준다.
나이 들어가면서 고약해질 때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알았어, 오늘 하루도 곱게 지낼게"
거울 속의 나에게 다짐 아닌 다짐을 건넨다.

집 앞 별다방이 있는 풍경

집에서 3분 걸으면 나오는 공원


3층 내 방 창으로 보이는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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