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생활의 소회

by Grace k

딸의 대학 졸업에 부쳐서

떠밀려서 이민을 왔다.
태평양을 건너서, 16시간의 시차까지 넘어서는 남의 나라살이.
녹록할 턱이 없었다.
20대에 먼저 경험해 본 외국 생활은 전공인 언어, 일본어를 쓰는 나라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땅, 해외여행 자율화만 되면 제일 먼저 가 봐야지… 하고 벼르던 나라.
젊음만으로 반짝반짝하던 20대 초반.
그때 찾은 일본에 비하면, 캐나다는 태평양을 건너는 만큼의 무겁고 아득한 선택이었다.
해외 생활의 뼈저린 경험이 있었기에, 환상 따윈 애초에 없었다.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대한민국 장녀의 '이민 가고 싶지 않은 이유'들을 줄줄이 무겁게 꿰찬 타국살이는 20년을 훌쩍 넘었다.
반백 년을 넘게 살면서, 순풍에 돛 단 듯 가는 인생이 몇이나 될까…
녹록치 않았다.
누구든 예상할 만큼의 고난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외로움에 동반자가 더 필요할 거라 생각하신 신의 가호로, 둘째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캐나다의 대자연과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큰 보람이 되었다.
생명을 낳고 성장케 하는 일은, 나라는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 발휘였고, 아웃풋이었다.
두 아이의 대외적인 성공 여부나 프로필은 내게 의미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의 키와 생각이 자라는 것 이상으로, 엄마인 내가 사람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려 할 수 있었다.
고난을 인내로 바꿀 수 있었고, 화를 기쁨으로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두 아이들 덕이기 때문이다.
장남이 올해 독립해서 분가를 했다.
딸이 내일 대학을 졸업한다.
엄마 품을 온전히, 반쯤 그렇게들 떠나가는 아이들을 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기특하고, 고맙고, 잘해준 것 없이 모성 하나로 지켜보는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착한 아들이 사춘기 ‘그 시간’을 지날 즈음 이런 말 한 적이 있다.
“아들, 다른 집처럼 다 해주지 못해 미안해.”
아들의 뾰족한 말투가 생생했다.
“그런 말 하면 슬퍼요.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나 편하자고 립서비스만 한 내 입술을 꼬매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그때부턴 비교도, 자책도, 감상적인 입발린 소리 따윈 꺼내지 않게 되었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그저 작은 깜냥으로 열심만 다했다.
착한 두 아이의 성장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를 웃게 하고, 고마움에 눈물 삼키게 한다.
전 세계를 삼킨 전염병은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을 미니어처처럼 축소시켰다.
5명씩 호명되면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 졸업장을 받아들고, 사진 찍은 게 다였다.
프롬에 들떠서 장만한 나름 고가의 드레스는 일생일대의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입어보지도 못하고 옷장 한 켠에 걸려 있는, 자린고비 같은 장식품이 되었다.
그런 세월을 보내고 맞는 대학 졸업식이다.
딸아,
너 혼자 태어나니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지게 되었지.
캐나다 속에서 잘 자라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한다.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말을 대신할 다른 표현이 없구나.
“사랑하고,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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