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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잘있거라. 모스크바여!

최고의 여행(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by 정달용

18. 잘있거라. 모스크바여!


찬비는 꾸준히 내리는데, 안주거리를 사기 위해 모스크바 강 다리를 건너고 약 1km는 넘을 법한 거리를 걸어 크램린궁 뒤 켠 노점상가에 가서 돼지고기 꼬치 2줄을 샀다. 이거면 저녁 한 끼와 보드카 한 병은 먹을 수 있으리라.


시월 초순 모스크바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러나 붉은광장 주변의 도심은 조금씩 내리는 차가운 빗방울에 반사되어 화려한 조명이 더욱 찬란하게 비추었고 넓은 광장은 우리와 같이 소수의 구경꾼들이, 때론 떼 지어 밀려오는 관광 인파로 메우고 있었다.


아들은 붉은광장 한복판에서 떠나는 것이 아쉬운 듯 팔을 크게 벌리고 하늘을 쳐다봤다. 나는 카메

라를 꺼내 이 모습을 오래오래 담아두고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이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자 붉은광장의 넓은 공간과 이어진 어두워진 하늘의 기운이 내 가슴으로 안겼다. 그 넓은 공간을 내 가슴으로 품고 있었다.


우린 모스크바강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숙소가 바로 강 건너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교 중간에서 다시 크램린궁과 붉은광장 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있거라, 모스크바여!"


언제 다시 이곳을 찾으리?


여전히 모스크바 강물은 도심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가을비 속에 빛나는 강과 도심을 선명하게 그어놓은 강변도로의 가로등과 차량들의 불빛, 모스크바 다리에서 바라보는 크램린궁 성채와 굼 백화점, 성바실리 성당 등의 모습이 아주 멀어질까 봐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시 발길을 돌려 숙소를 향했다. 조금씩 내리는 시월의 밤비는 걷는 열기보다 온몸에 스며드는 찬 기운이 먼저 다가왔다. 비를 맞고 오랫동안 걸은 탓에 지치기도 하고 배도 고파 씻기 전에 식사를 하기로 했다. 불에 구운 지 오래되고 비에 젖은 봉투 속 고기는 싸늘히 식어 있었지만 안주 삼아 먹으니 배도 차고 독한 술안주로도 적합했다.


앞으로 언제 이런 여행이 또 있을까? 생각하니 너무 값진 16일간의 여행으로 다가왔다. 아들도 마음은 같을 것이다. 앞으로 나이가 차 결혼을 하고 자식들이 생기면 이런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흔치 않을 아들과의 여행, 둘이 대좌하는 술자리, 아들은 내가 세상을 헤쳐 나왔던 젊은 시절이 궁금한가 보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도 했고, 같이 의미 있는 시간도 보냈지만, 막상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는 마음엔 진한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이번 여행이 오래도록 내 삶의 주변에서 머물러 있겠구나!"란 생각에 오늘 이 자리가 더욱 소중해진다.


아빠인 나와 나의 아들, 우리 사이는 부자간이었고 또한 남자와 남자의 관계였다. 우리 사회에서 아빠와 딸의 관계와는 다소 다른 아빠와 아들의 관계,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상당히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아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이번 여행 초기의 숫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에 이제 세상 어디에 내놔도 살아가겠구나!라는 든든함이 나를 뿌듯하게 한다.


1977년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졸업한 나는 귀향하여 시골에서 머물렀었다. 젊은 청춘이 아까웠다. 그동안 읽던 책을 팔아 서울 영등포에 발을 디뎠다.


까짓꺼! 굶어 죽기야 하랴? 하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그렇게 세상과 맞서봤다. 그것이 청춘이었다.


이제 아들이 그때가 되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다 자라 성인이 되고 스스로 살아가야 함을 알고 서서히 눈을 떠가는 아들이었다.


나는 11살 되던 해 봄 방학 때 나의 부친을 세상을 뜨셨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11살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어찌 보면 너는 행복한 아들이구나! 아빠는 이런 자리가 없었는데"라고 마음속으로 해본다.


어느새 으젖해 졌고, 두려움 없이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아들의 모습, 생각도 제법 어른스럽고 깊이가 있는 것이 이제 내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대견함이 든다.


이제 아들도 부모 곁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싶다.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고 다 자란 새가 어미 곁을 떠나듯이...


그렇게 세월은 강물과 같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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