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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저~어기"

우리 할머니

by 정달용

4. "저~어기"

오늘은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어디를 가시는 걸까? 큰 형님을 수양아들 삼은 수양엄마 댁을 가신단다.

그 시절 수양아들이라면 아들 없는 가정에서 자식 정도 되는 남의 아들을 데려다 기르는 것을 말하지만 아마 우리 형님은 아는 지인의 지나가는 얘기 속에서 수양아들 삼고 싶다는 말에 역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 됐든 네댓 살쯤 되었을 나는 어디를 간다면 신이 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세상은 오직 달밭 고랑탱이의 좁다란 골목과 주변의 들과 산 그리고 동네 주변에 있는 우리 논과 밭이 전부였다.

따라서 바깥세상은 항상 궁금했고 기껏 가 봐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이나 내내 다르지 않은 산과 들의 모습과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지금이야 여행이라면 며칠을 자가용을 타고 떠나거나, 아니면 그 흔한 해외여행쯤 생각하지만 그때는 여행이라는 단어는 생겨나지 않았을 때이다. 기껏해야 외갓집을 가거나 나이 들어 시집간 누나집에 가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구르마 바탕을 돌아 우리 논이 있는 곳으로 조금 걷다 보면 저 멀리 모때기가 보이는데 그 모퉁이를 돌아 새롭게 펼쳐지는 모습이 궁금했고, 눈앞에 펼쳐지는 들판은 내 집 앞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어린 나에게는 길 바닥에 널려 있는 돌멩이 하나에도 새로웠다. 길 가에 자라는 곡식의 잎사귀들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회초리에 맞아 힘 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즐기며 이인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달밭 동내 앞

그때는 이인에 닷새만에 5일장이 섰었고 때문에 면내 가운데에는 장터가 있었다. 그 장터 옆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또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 마을길로 들어서 나지막한 언덕을 지나면 넓은 들이 나타나고 할머니와 나는 제멋대로 된 논과 밭을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들길을 간다.

달밭을 나올 때 가볍던 발걸음은 어느새 무거워지고

"할머니! 어디까지 가야 돼?"
라고 물으면
할머니는 들판 너머 산 모퉁이를 가리키며

"저~어기까지 가면 돼"

라고 하신다.

나는 속으로
"아하!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고?
다 왔네!
무겁던 발걸음은 어느새 가벼워지고 아까 가리켰던 모퉁이를 거의 다 와서 보니 새로운 들판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할머니는 다 왔다는 모퉁이를 돌아서서도 아무 말 없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신다.

"할머니! 얼마나 더 가야 돼?"

할머니는 이번에도

들이 끝나는 산 모퉁이를 가리키며

"저~어기까지 가면 돼"
라고 하신다.

"저~어기, 저~어기까지"가 몇 번 반복되어서야 드디어 "저~어기"가 끝났다

나의 살던 집


그 할머니의 "저~어기"가 끝난 곳은 그 낯선 마을의 끝나는 곳 낯은 언덕의 조그만 절이었다.

그 절 입구에는 그리 크지 않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느티나무의 주인은 제법 자란 흰 털에 검은 무늬를 한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리고 아담한 암자에는 제법 나이가 든 비구니 여승과 일을 돌보는 신도가 한 분 계셨던 듯하다. 그리고 담도 없는 확 터진 마당 한쪽엔 제법 큰 강아지 한 마리가 한가하게 졸고 있었다.

그 개와 고양이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서로 돕는 관계가 아니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고양이가 땅으로 내려오면 누워있던 개는 고양이에게로 다가간다. 고양이는 매섭게 달려들어 발톱으로 개의 얼굴을 할퀴고 옆에 있는 느티나무로 재빠르게 올라간다.

개는 그때서야 고양이를 쫒으나 그 고양이는 어느새 나무에 오른 후였다. 개는 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분한 듯 올려다본다.

나는 할머니가 나올 때까지 신기한 듯 개와 고양이의 서로 풀 수 없는 원한관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할머니와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오기 시작했다. 익어가는 들판 사이로 제멋대로 난 들판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택시가 있었다. 누가 결혼을 했나 보다. 그 시골길을 달려가는 택시의 옆과 지붕에는 여러 개의 풍선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들판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화창한 어느 가을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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