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여행(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 2016.09.26(월) 오후
끝없는 벌판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상상하고, 민주벌판을 누비던 고구려 옛 조상들의 기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멋진 여행이란 생각에 들떴던 마음은 사라지고 러시아에 대한 실망과 분노만 남게 된 상황에서 "어찌 됐든 이 열차를 타고 보자"는 아들의 판단 덕분에 지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할 수 있었다. 만약 "99번 열차"를 타지 못했다면? 이란 상상을 할 때마다 아찔한 생각이 든다.
나는 업무용 패드를 가지고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을 하면서 멋진 생각이 떠오르면 기록해 놓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이틀간을 생각할 때 기가 막혔다. 이러려고 이곳 시베리아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매사가 꼬인단 말인가? 비행기의 연착에서부터 시작된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들의 하나하나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지만 이곳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서는 오늘까지의 상황들은 모두가 현실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짐작이 되었다. 이게 여행인가? 이건 여행이 아니었다. 현생에서의 지옥이었다.
그 아찔한 순간순간들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든다. 이제 너무 한적하여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철거적 철거덕 쉼 없이 철마는 달려가고 있고 지금도 무심히 바라보는 창밖의 시베리아 벌판 자작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있다.
몸은 그토록 상상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어느 의자에 앉아 있으나 초점 잃은 눈동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자작나무 숲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고, 마음은 인천공항에서부터 이 열차에 승차할 때까지의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한 권의 장편소설을 단숨에 읽고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된 듯이 그때의 상황들에 빠져들어 있다.
2016년 9월 24일 토요일 16시 10분(한국시간) 인천공항에서 7s airline 시베리아 항공기를 타고 당일 19시 15분(현지시간, 한국보다 1시간 빠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다, 그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는 있어야 블라디보스톡역에서 23시 50분에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블라디보스톡 ~ 모스크바 99번 열차)를 탈 수가 있었다.
그런데 s7 airline 여객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늦게 출발하기 때문에 인천공항에서 출발도 4시간이나 늦은 20시에 출발한다는 안내문구가 올라왔다. 예약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지 못한다면 연착된 블라디보스톡 항공기를 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출국 심사원 아가씨한테 항의한 끝에,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입국하면 해당 항공사 직원이 기다릴 것이고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출발한 여행, 자정이 넘어 도착한 공항엔 기다릴 것이라는 항공사 직원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말은 통하질 않는데, 뭐라 말만 걸을라치면 사나운 표정과 인상을 쓰면서 "씨브랄느므쌔끼^♡?@♡#^~/()?!@:;*"하듯 거친 억양으로 대답하는 것이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득찼던 항공기 승객들은 밤이 깊었는데도 모두 제 갈 길로 가고 많은 인파로 가득해야 할 넓은 공항에 남겨진 두 사람, 아들과 나 둘 뿐이었다.
떠난 기차를 돌려세울 수는 없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돌아가야 되나? 고민을 해보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틀 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는 것뿐이었다. 그 와중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인 납치조심"이라는 핸드폰 문자를 여러 번 받고는 어디선가 금방 우리를 납치할 북한사람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낯선 이국의 공항에 내팽겨진 우린 의지할 것은 러시아 주재 대한민국 영사관뿐이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 1시에 걸려 온 전화에 영사관 직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난감해하고,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매달리는 나, 때문에 국제 전화요금만 잔뜩 부과되게 되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아들은 "하바롭스크 항공기"의 이용이라는 아이디어로 막힌 혈을 뚫었고, 아침 7:30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만에 하바롭스크 공항에 내렸다.
3, 4시간 일찍 도착한 하바롭스크역에서 만약을 위하여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차권의 확인을 하려 했으나, 무표정한 안내원의 반응에 새로 발급받은 승차권, 그것은 또 하나의 우여곡절의 단초가 되었고, 내 삶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이 여행을 포기할 수 없어 예정에 없던 항공기를 타고 이곳까지 왔건만 승무원한테 승차는 거부되었고, 또다시 아들의 번뜩이는 판단에 하바롭스크에서 승차권을 새로 구입하기 위하여 역사로 달려가고, 나는 떠나려는 열차를 잡아두고 횡단열차 승차권을 새로 구입해 오는 숨 막히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이것은 과정 하나하나가 여행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그동안 집으로 소식을 전한 것이 없어 궁금하겠다 싶어 간략하게 소식을 전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지옥이다"라는 제목으로 그동안의 상황을 간략하게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문자를 보낸 것이다.
마침 나와 아들이 장기간 여행을 떠나고 집에 남은 아내와 딸은 오랬만에 모녀간에 호젓한 자리를 하고자 금정역 인근의 제법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에서 삼겹살을 주문해 소주 한잔을 하려는 찰나에 그 문자를 받은 모양이다.
문자를 본 모녀는 놀라서 술이고 뭐고 싹 달아나더란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씩 하며 그때의 오싹함을 느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