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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Nov 17. 2021

아직도 가야 할 길

퇴字맞고 사는 법

 의지가 약해서일까? 

평생을 동기부여나 자기 계발에 관한 책들을 끼고 살았다. 족히 수백 권은 읽었지 싶다. 

무협지에 빠져 사는 형님이나 허구한 날 소설책만 읽는 친구를 보면서 그게 그건데 뭘 똑같은 걸 읽고 있나 싶은데 저들이 보기엔 나 또한 그리 비치는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내 변명은 건강 보조 식품을 먹듯이 꾸준히 읽어줘야 도움이 된다는 항변이다. 

기실 한 발짝 건너서 보면 다 비슷비슷한 애기들이다. 그중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책들이 몇 권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스캇 펙 박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Roadless traveled)’이다. 줄거리는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과거를 돌아볼수록 내가 가보지 않은 길들에 대한 미련과 궁금함이 남는다.  물론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다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하지도 못할뿐더러 한 번뿐인 인생이니 한꺼번에 두세 가지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유독 눈에 아른거리는 길이 있다. 


 브런치 작가에 선정되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게 작가명을 정하고 프로필을 작성하는 일이다. 

응모하기 전부터 생각해 둔 터고 또 평생 동안 수도 없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써 본 만큼 포트폴리오를 채우는 것까지는 그다지 어려울 게 없다. 하지만 글의 주제와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쉽지 않다. 각각 3개씩밖에는 고를 수 없어 이걸 골랐다가 지우고 다시 저걸 체크하기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내가 해 온 일이 이게 맞나 아니면 저걸 골라야 하나 하는 망설임이 있다. 

또, 분명 내 경력에는 없었지만 했더라면 싶은 주제(일)와 직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도 시간을 지체하는 이유다. 그런 망설임 속에 느닷없이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저 책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브런치에 자리를 잡고 어떤 제목으로 글을 쓸까 하다가 ‘퇴字맞고 사는 법’이란 표현이 떠 올랐다. 

은퇴가 됐건 명퇴가 됐건 본의 아니게 퇴출을 당했건 모두에게 물러날 退의 퇴자가 붙는다. 

 IMF 이후 불어닥친 불황은 우리에게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심지어는 삼팔선이니 해서 점점 더 일찍이 일터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해 오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로부터 시작해도 우리 기업의 역사가 고작 한 세기 남짓인데, 아직 정년이니 은퇴니 하는 용어나 문화가 정착되기도 전인데 일에서 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억지로 손목을 비틀고 손가락을 펴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퇴자들이 쌓여간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드는 건 고령사회니 초고령사회니 하면서 평균 수명은 오히려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퇴자로서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80, 90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은커녕 퇴임 이후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일도 없는데 나더러 그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혼자서는 두렵다. 

해서 여기서 마이크를 잡는다. 

누군가는 귀 기울여 주기를, 나아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내 본다. 작가 소개 말미에 쓴 수작 후인정(遂作後人程)은 서산대사가 썼다는 답설야중거라는 시의 말미를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눈 길을 갈 때 똑바로 걸어야 하는 이유는 그 발자국이 뒤따라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은퇴 후 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베이비 부머의 삶은 첫눈에 첫발을 내딛는 셈이다. 

 옳든 그르든, 싫든 좋든 뒤따라 올 후대에게는 은퇴 후 삶의 기준이 되리라. 기대하기는 바람직한 샘플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퇴짜 맞고 사는 법을 향해서 눈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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