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효용성

by 찾다가 죽다

핏 줄이 터져 단다. 이 나이쯤 돼서 병원에 가면 빈 손으로 오는 법이 드물다. 속을 들여 다 보면 용정을 달고 오고 안과에 가면 백내장을 하사 받는다. 노안이니 흐려지는 게 마땅할 터인 데도 개운치 않다.

교보 문고에서 올 해의 작가로 두 명을 선정, 발표한다. 한 명이야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니 마땅하다. 그런 데 또 한 사람은 개그맨 출신으로 그가 쓴 책을 한 두권 읽은 기억이 있다. 기사를 보니 죽음에 이르는 교통사고를 겪은 뒤 20년 동안 3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슬며시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을 헤아려 본다.

조선 후기 지식인 가운 데 한 사람인 이덕무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의미인 즉, ‘책만 읽는 바보’쯤 될 듯하다. 서얼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묶었다가 실학을 중시하는 정조의 정책으로 중용되어 청나라에까지 다녀온 뒤 북학을 주창할 만큼 박식했 던 인물이다. 그는 왜 자신을 책만 읽을 줄 아는 바보라고 자조적인 탄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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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0여 년 뒤, 끝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 한일합방이라는 국치에 이르게 되자 재야 학자 매천 황현은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이라는 시구가 담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아편을 한 입 털어 넣은 채 세상을 하직한다. ‘어지러운 세상에 배운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구나’라는 매천의 탄식은 앞서 형암 이덕무의 책 읽는 바보라는 아호에 닿아 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은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들에 이어진다.

끝내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고 시국선언이라는 소극적 저항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면하려 한다. 하나 은퇴한 뒷방 노인네에게는 그 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조사에 따르면 불혹에서 지천명을 너머 이순에 이르는 소위 기성세대들이 다수와 생각을 같이 한다. 70 줄에 들어서는 종심(從心)에 이르러서야 잘하고 있다는 소수(?) 의견을 견지한다. 공자가 틀린 걸까 아니면 아직 종심에 이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정말 내 생각이 잘 못된 걸까?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소수 내지는 반골이라고 치부하며 지내왔다. 또 주변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적잖은 이들이 자신 또한 그러 노라고 동조한다. 그러 던 생각들이, 아니 주변 지인들과 70을 목전에 두고 갈린다. 은퇴한 까닭일까? 이사 온 지역 탓일까?

의사는 독서와 컴퓨터 작업을 줄일 것을 권한다. 그래! 어차피 쓸모없는 짓거리(?) 일진 데 하면서도 자판을 두드린다. 책상머리에는 엊그제 시내 서점에 들른 김에, 또 인터넷 주문으로 도착한 책들이 눈 길을 끈다. 몸이 늙는 걸까 철이 드는 걸까? 이래서 저들은 바보라고 자조하고 죽을 만큼 절망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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