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와 화초 사이
다 때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경험치에 한해서는 수긍하지만 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선 듯 동의하지 못하는 부류다. 누구 말마따나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전원주택(이는 매우 미화된 표현이고 실은 풀 때문에 상당한 심적 부담을 안고 사는 주거 형태다)에 이사 온 뒤로 유독 두 사람의 행동에 의문이 가곤 했다. 마당에서 현관에 들어서려면 대여섯 계단을 올라와야 하는 데 올 때도 갈 때도 여지없이 좌우에 난 풀을 뽑아 던진다. 뭐지?
왜 남의 집에 난 풀에 손을 대는 걸까? 하는 의구심스러운 눈빛을 알아챘는지
“아, 이게 안 보여요?”,
“뭐가요?”,
“이렇게 잡초가 자라도록 놔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그게 잡촌가요?” 그때마다 돌아오는 한심을 넘어선 조소와 비난이 섞인 응징의 눈초리. 그땐 몰랐어요 난 내가 잡초와 화초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괜찮아요 내 눈에는 그게 그거니까. 그렇게 몇 년을 버텨왔다. 그러던 내가 올해 그러니까 이사 온 지 정확히 4년 차 때부터는 들며 나며 풀을 뽑기 시작한다.
두 가지 변명 섞인 이유가 있다.
첫 째는 새벽이면 맨발로 잔디밭을 걷는 데 그때마다 잔디 속에 올라오는 다른 풀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해 엎드려 하나둘씩 속가내기 시작했다. 물론 평소의 내 지론대로라면 잔디와 잡초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토끼풀로 뒤덮인 잔디밭을 보면 이건 아니지 싶은 생각에서다.
둘째로는 첫해, 둘째 해 동안 밭에 고구마 옥수수 호박 감자를 심으면서 그대로 나뒀더니 한 열흘 출장 다녀온 새에 밭이 정글로 변해버렸다. 옆집 사람이 잔뜩 독이 오른 눈빛으로 찾아와 선 ‘댁이 유기농이니 뭐니 하는 건 좋은 데 우리 집으로 날아오는 풀씨는 어찌할 거냐’며 따진다. 그 집은 사흘이 멀다 하고 제초제를 뿌려 대서 농작물 외에는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혀로 핣은 듯하다. 약이 오를만하다. 이웃을 위해서라도 관리가 필요하다.
주택 생활 4년 차, 아직 울타리 주변은 잡초와 덩굴로 무성하지만 그래도 부직포로 덮고 돌을 깔고 나름 눈에 띄는 대로 뽑아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곤 자백한다. ‘아, 이 것도 때가 있는 건가?’ 평생을 책상물림으로 기업이나 대학에서 펜대만 굴리다가 굳이 밭이 있는 집을 장만한 건 유배 생활을 하던 옛 선비들의 생활이 궁금해서다.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가는 경험이 하고 싶어서다.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마음과 몸을 일치시키는 ‘뫔의 인문학’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여전히 내겐 반나절의 바깥일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대여섯 장의 글을 쓰는 게 더 편하고 익숙하다. 그럴 때마다 ‘행동하는 인문학’을 외치는 자신이 부끄럽다. 인터넷이 전 세계를 연결하기 시작한 30여 년 전부턴 책상 앞에 앉아서도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 그러다가 스마트 폰이 일사화되기 시작하니 이젠 책상 앞을 떠나 서도 모두와 연결된다. 몸을 쓸 일이 없어진다. 그러던 것이 인공 지능을 만나게 되니 몸은 물론 마음(생각)마저도 고착화돼 가는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각(hallucination)이나 확증 편향을 비난했었다. 요즘 자신이 생각을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잡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건 움직이라는 신호다. 책상보다는 마당에 있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지금이 그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