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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Jan 18. 2022

공유에 관한 고백

지역 사회와 공동체

공평이니 공정이니 등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뜨겁다. 

국내에 소개된 미국 교수(마이클 샐던)의 책 때문이라고 하지만 매사에는 다 때가 있게 마련이다. 

공정이 인구에 회자하는 것 또한 그때가 이르렀음이리라.   

  

뒤늦게 대학에 가서 딱 한 번 맡았던 보직이 인문사회 연구소장이었다. 

그리고 그때 유일하게 실행했던 연구 과제가 당시 미래창조과학부와 교육부가 주관했던 

무한상상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다가오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한 미래 준비 교육 과제다. 

3D 프린터와 아두이노 같은 장비를 체험하면서 또 인공지능이나 로봇 등에 관한 영상을 보면서 각자 미래 준비를 생각해 보는 수업이다.     


이때 더불어 치열하게 다뤘던 주제가 ’공유 경제‘다. 

정작 국내에는 들어와 있지도 않은 그리고 나 자신은 경험조차 해 보지 못한 에어 비앤비 같은 숙소 제공이나 우버같은 차량 서비스를 예로 들면서 공유 경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미화한 기억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두레나 품앗이가 공유 경제였기에 조만간 국내에도 정착할 거라는 어쭙잖은 예측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미국도 우버나 리프트같은 서비스 때문에 택시 기사들이 생계 위협을 받고 자살에까지 이르는데 반해 우버의 창업주 트래비스 캘러닉의 자산은 수천억에 이른다는 기사는 나를 혼랍스럽게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국내 유사 서비스의 갈등과 법정 다툼...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우연히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라는 책을 접한다. 

여성 최초의 노벨 경제학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엘리나 오스트롬이 1990년에 쓴 책이다.

 그 발단은 그에 앞서 1968년 게릿 하단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공유재의 비극‘이라는 논문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혼란은 가중된다. 

공유 내지는 공유 경제에 대한 오해와 잘못 가르쳤다는 부끄러움이다. 

다시 돌아갈 수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당혹감에 선거를 앞두고 언론에서는 공평과 공정, 분배, 기본 소득, 일자리 축소와 공유 등의 기사가 넘쳐난다. 무엇하나 제대로 된 내 의사를 갖추기 어렵다. 


핑계하자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쯔나미처럼 몰려오기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몫이어야 한다. 


오스트롬은 책에서 지하수나 수자원 같은 공유재는 완전 사유화나 정부 통제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자치적 관리‘가 최적임을 여러 나라의 사례 연구를 통해 밝혀낸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동조하기보다는 ’글쎄?’하는 회의가 더 짙게 드는 건 나뿐일까?


은퇴하고 도심 외곽의 전원주택 생활을 하고 있다. 10여 년 전 역시, 도심을 떠나 바닷가에 살 때보다는 지역 이질감이 현저히 약해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이동 인구가 많아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이 우세일 때는 외지인으로서의 배제는 느꼈지만, 저들을 중심으로 하는 결속이나 지역 보호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자발적 지역 공동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공백의 시간이 지나면 점성이 생기려나? 

이 또한 동년배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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