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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Jan 31. 2022

”헤쳐 모여!”

어디가 ‘기준’인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가족이나 가족애를 기반으로 하고 영화 어딘가에는(특히 말미에) 반드시 성조기가 비친다. 누가 시켜서는 아닐진대 아마도 이민자들이 세운 다민족 국가의 결속력이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흐트러지고 다양할수록 중심이 필요한 데 그 기준은 가족이다.


  군에 입대해서 훈련받던 시절, 막바지에 가면 취침 중에 비상이 걸린다. 잠결에 모포를 개서 배낭을 꾸리고 철모를 쓰고 방독면까지 차고 총을 거머쥐고 칠흑 같은 연병장으로 뛰쳐나간다. ‘기준’ 소리는 들리는 데 가늠하기 어렵다. 자연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동기들이 우왕좌왕한다. 총기와 철모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하다. 


 세계 경제 포럼 회장이란 사람이 4차 산업 혁명이란 책을 흔들어 대고, 때마침 바둑왕 이세돌이 인공지능에 패하고 티브이에서는 연일 로봇이 사람 행세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큰일 났다!’ 싶었는데 이 또한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가 덮쳐버려서였을까? 아니면 연일 터지는 가상현실이다, 블록체인이다, 메타버스에 딥 페이크까지... 압도된 나머지 무감각해진 걸까?

그런 와중에 공유 경제니, 기본소득이니 하는 낯선 표현들은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을 오르내린다. 수십조 원을 쏟아부었다는 출산 정책에도 인구감소는 멈출 줄 모르고 일자리 창출이 연일 핫이슈지만 실업률은 도무지 개선되질 않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잠시만 호흡을 가다듬어 보자 (코로나가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만 그동안 달려온 관성 때문인지 가쁜 호흡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그래도...)    

 

가만 들여다보면 재택근무나 비대면 수업, 컴퓨터 게임의 모습으로 일과 공부와 놀이가 집 안으로 모여든다. 

가정이 해체되고 1인 가족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일과 배움과 놀이의 터전은 다시 그 가정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울 게 못 된다. 

산업화로 도시화로 고향을 떠나기 전, 농업사회의 가정은 의식주의 원천이었으며 일과 배움과 놀이가 아우러지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기원은 원시 수렵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굴에 모여 살 때부터 그 단위는 가족이었고 사냥하러 나서는 아버지는 일하러 따라나서는 아들은 배우러, 돌아와 배불리 먹고 모닥불 주변에 모여 놀이도 다 함께.. 이것이 노동요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하여 오늘 일과 배움과 놀이의 합체 회유는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에 다름 아니다. 

단지 70억 인구가 여하히 7억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젠데 이 또한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다.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3년째 우리는 그 실험을 겪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복원의 구심점이 가정이라는 사실을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인지하는 일이다.


오늘 헤쳐 모이는 재구조 속에서 들려오는 기준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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