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찾다가 죽다 Feb 18. 2022

코로나의 교훈

개인 사회 국가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십자포화가 3년째 그 화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적응하며 익숙해져 가고 있는 우리 삶을 돌아볼 때 이젠 코로나가 

종식돼도 이전과 같은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할 거라는 예감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팬데믹을 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해서 코로나 이후에 대비할 것인가?


사견이지만 가로, 세로, 높이로 입체적 사유를 펼쳐본다

먼저 가로축에 해당하는 개인적 차원이다

100미터를 전속 질주하거나 풍선의 헬륨 가스를 들이마신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면 제대로 된 목소리는커녕 음정, 박자를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해방 이후 우리는 선진국을 향해 초고속으로 달려왔다. 그 결과 70년 만에 세계에 유례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 냈다. GDP 기준 세계 8위, 3050 클럽(인구 5천만 이상 가운데 개인당 국민 소득 3만 불 이상) 가입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달성한 것이다. 

코로나는 이제 우리에게 숨 고를 시간을 요구한다. 

모두가 양팔을 벌리며 숨쉬기를 통해 각자의 호흡을 진정할 때다. 과도한 경쟁의 후유증을 돌아볼 때다. 

어떻게든 이기고 볼 일이라는 승자독식을 반성할 때다. 

신호만 바뀌면 튀어 나갈 생각에 가속기에 발을 얹고 공회전할 때가 아니라 브레이크에 발을 옮겨 놓고 좌우를 돌아볼 때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다음은 세로축에 해당하는 사회적 차원이다.

양복은 서양 옷을 걸친 채 뒷짐을 지고 갈지자로 걸으며 양반 행세를 해왔다. 

자동차를 몰고 회사에 다니지만, 서로가 부르는 호칭에는 유교적 서열이 생생했다. 

비대면은 높이를 제거한다. 

교사가 선 교탁과 학생이 앉은자리, 성직자가 올라선 강대상과 신자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설교를 듣는 낮은 자리, 앉은 채 호통치는 갑과 서서 지적을 받아야 하는 을, 모두가 비대면에서는 눈높이를 같이 한다. 노사 토론이 입찰이, 심사가 수직적 서열을 극복한다. 여기에 더해 대기업들은 직책을 없애고 호칭을 통일한다. 

권위주의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끝으로 높이 축은 세계적 관점이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방역 마스크 공급으로 허둥대거나 의료 체제가 미비한 선진국을 보면서 그동안 품어 왔던 동경을 회의한다. 오매불망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던 선진국이 저런 모습이었나? 

좌표를 수정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박태웅의 표현대로 어린아이적에는 키만 재면 됐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혈압과 혈당, 콜레스테롤 등 나이에 걸맞은 측정과 관리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 노인 자살률 등은 결코 바람직한 선진국의 잣대가 아니다. 

정의(正義)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정의(定義)가 공유되어야 한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하거라’는 권위주의의 잔재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통용되는 개념과 원칙을 공유해 나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코로나 종식이 더딘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작가의 이전글 정의가 없는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