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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Mar 31. 2022

메멘토 모리와 오상아

이어령과 김정주

  잊으려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두 이름이 있다. 

넥슨의 창업자로 우리나라 게임업계를 주도한 김정주 이사에 대해선 많이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이어령 선생에 대해선 많이 아느냐? 그도 아니다. 

나를 중심으로 두 분과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면 오히려 김정주가 더 가깝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에 대해서 좀 더 아는 편이다. 서가를 보니 특정 작가의 책을 가장 많이 읽은 게 당신 글이다. 그중 10여 년 전에 펴낸 ‘유쾌한 창조’에서 당신이 말한 실패할 세 가지 시도-한중일 비교 문화 연구소, 창조학교, 한국인 이야기-가 뇌리에 남는다. 비할 바는 못되지만 ‘한일 관계- 왜 이웃한 나라는 불편할까?’ 같은 글쓰기, 미래 창조 과학부가 주관한 ‘무한 상상실’ 운영, 혹은 지자체의 평생 학습에 한국인의 과거와 미래를 더듬는 강좌 개설 같은 일들이 내 멋대로 동질감을 갖게 한다. 


대학에 있으면서 유일하게 했던 보직이 인문학 연구소 소장이다. 그때 여러 동료 교수들과 사생학(Thanatology)을 화두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많은 토론과 논쟁을 거쳤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 때문일까?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호랑이 가죽 못지않은 이름을 후대에 남기면서 흔적도 없이 떠난 사람과 떠난 뒤의 메시지까지 생각해 둔 사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의 개선장군이 금의환향할 때 뒤따라오면서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외침이었다고 한다. 생의 정점에서 죽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장자가 말했다는 ‘오상아(吾喪我)’ 곧,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 또한 죽음을 떠올리는 말이다. 


이어령 선생은 세 가지 모두 가장 완성도 높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연구와 업적을 끌어올렸음에도 왜 실패할 세 가지라고 했을까? 김정주 이사는 무엇 때문에 엄청난 부와 명성의 정점에서 스스로의 삶을 포기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두 사람 모두 살아있는 동안 누구보다도 죽음을 의식하고 치열하게 살았을 거란 점이다. 

기대 수명이 80을 넘어 90 심지어는 100세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실제 그 나이에도 활달하게 사회생활하는 명사들을 보며 심정적으로 우리의 기대 수명은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죽음을 외면하는 삶, 마치 전쟁터에서 널브러진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피난이라는 생존의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세상 사는 동안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는 그 어느 곳에도 없건만 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야 할까? 

연일 발표되는 코로나로 인한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에 무뎌지는 것도 이 때문일까?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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