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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Apr 08. 2022

간서치와 AI

독서와 번역


 간서치(看書痴), 말 그대로 '책만 보는 바보'로 우리가 잘 아는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이덕무가 자서전을 쓰고 간서치 전이라 제목을 붙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로 불리며 당대의 실학을 주도했지만 서자 출신이다. 정조가 비록 서얼 중용 정책으로 벼슬에 나아갈 길을 열어줬지만, 제도권 진출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해서 글을 볼 줄 아는 그가 할 수 있는 짓은 고작 글을 읽고 쓰는 일이었다.     


 은퇴 후 딱히 할 일이 없어 책 보고 글을 쓰거나 오래전에 미뤄뒀던 번역서에 매달리며 소일한다. 

남 보기엔 그럴듯할지 몰라도 달리 생산적인 재주가 없어 책을 붙잡고 있는 당사자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번역 얘기를 꺼내니 오래전 제일 처음 번역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내 기업과 외국 회사 두 차례 도합 10여 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창업을 한다. 사업자 등록증을 교부받으러 관할 세무서에 가니 컨설팅이라는 업종이 없단다. 해서 서비스업으로 등록하고 일을 시작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회사들의 광고, 판촉물 제작이나 판촉 행사 등을 상담, 대행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영문, 국문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주한 외국 상공회의소나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영업도 하고 거래처가 될만한 곳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점점 힘들어지고 위축되자 외출은 잦아들고 자연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회사라고 해야 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대여섯 명이다. 사장실과 직원들이 있는 공간은 유리 칸막이 하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니 직원들이 신경 쓰이고 끝내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자리에 앉아 번역에 손을 댔다. 


 물론, 컨설팅이 생소하던 시절이라 어떻게 영업하고 어떻게 제안서를 쓰며 얼마를 청구해야 적정한지 등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해서 처음에는 공부 삼아 시작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번역은 일이 됐고 대학으로 옮긴 후에는 전공 관련 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번역에 대한 중압감은 훨씬 덜었지만... 


 헌데 요즘 다시 번역에 몰두한다. 사업을 위한 것도 연구를 위한 것도 아닌 평소 관심 있던 샤머니즘이나 심리학 등에 관한 책들이다. 그래도 공통점 한 가지는 뭔가는 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의 탈피다.


나만 그럴까?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심지어는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이 느낌은...


 역시 오래전 번역한 책 내용 중에 현대인은 항상 뭔가를 읽고, 쓰며,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한 데 그게 경쟁 심한 정보사회의 후유 중이란다. 

난 은퇴를 했고 굳이 남들과 경쟁할 일도 없는데 왜? 습관 때문일까? 아니면 후유증?     


 ‘책만 보는 바보’ 이 안에는 자책을 넘어선 자기 원망이 보인다. 책을 붙들고 있어 봤자 배고픈 식솔들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줄 수 없다는 비애, 공부를 해봤자 비뚤어지고 모로 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 내뱉을 수 없다는 자괴, 한 달은커녕 일 년이 가도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좌절 등등이 읽힌다.


 인공 지능과 딥 러닝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독서는 홀대받고 생각은 진공상태가 되어 간다.

‘저자의 생각이 멈추는 곳에서 독자의 생각은 시작된다.’ 누구의 말인지는 잊었지만 공감한다.

그래서 난 독서가 주는 생각의 빌미를 잡으려 오늘도 책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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