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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May 24. 2022

변신의 고통

교수에서 농부로

 진통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 겪는 고통이기 때문에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지겹다는 표현은 시신을 대할 때의 오싹한 느낌이란다.      


 은퇴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뒀던 일 가운데 하나가 치유사(테라피스트)로 봉사하는 일이다. 특히 빅터 프랭클에서 시작된 의미 요법(Logo Therapy)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준비를 꾸준히 해 온 편이다. 우리 사회가 고속 성장의 후유증이랄까? 청소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우울증, 왕따, 분노조절 장애, 자살률 등등에서 심각한 병리 현상이 급증하는 이유는 대개가 심인성 질환이다. 나 스스로도 늘 나는 옳은가(Am I right?)라는 물음에서 나는 정상인가(Am I normal?)를 묻는 횟수가 잦아졌음을 발견한다. 


 교외의 전원주택으로 이사해서 흙을 만지며 화초를 가꾸려는 것도 마음을 다스려 보자는 생각에서다. 반려 식물이니 치유 농업이나 하는 용어나 활동이 빈번해지는 것 또한 이러한 수요에 대한 반증이라는 생각이다.     

 치유에 관한 수많은 자격증은 하나같이 민간 기관에서 발행하는 것들이다. 공신력이 낮다. 하여 근자에 신설된 정부 주도 하의 자격증 과정에 응시하고자 서류를 제출했지만 완전한 자격 미달 판정을 받았다. 대기업, 다국적 기업의 경력도, 대학 교수나 박사 학위도 농업이라는 전혀 새로운 도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치유에 관한 심리학적 지식과 경험은 부차적이다.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경력이 무력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은퇴하면은 사회생활할 때 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라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변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생각을 다 잡는다. 진정하고자 하는 일이 봉사라면 봉사에 집중하자! 남을 위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보자! 알을 까고 나오는 진통을 즐기자!


 이렇게 해서 ‘들은풍월로 전원생활을 즐기기(줄여서 즐풍 전생으로 부제(附題)를 달아 이따금 초보 농부의 애환을 이곳에 남길 참이다’ 위한 완전 초보의 삽질, 호미질, 낫질이 시작된다. 지나가다 곁눈질로 흘깃흘깃 살피는 이웃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쩌랴? 아니 어쩔 텐가? 평생을 펜 자루만 잡던 손이 난생처음 하는 삽질치 고는 이만하면 괜찮은 거 아닌가?     


 책, 특히 고전을 대하다 보면 유배 간 선비들의 이야기가 유독 뇌리에 남는다. 죄인으로 몰려 위리안치된 상태에서 딱히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평생 농기구를 잡아 본 적도 없다. 하물며 추운 겨울 양반 체면에 땔나무를 구하러 산엘 올라간다? 어불성설이다. 때문에, 냉방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애먼 논어 맹자만 목청껏 읊어댔으리라.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에 장사 있나? 마침내 텃밭을 일구고 땔감을 구하러 산을 기어오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비로소 민초들의 애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고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기록을 남긴다.      


 인성이 무너지고 인문학이 공전하는 이유는 흙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유치원장 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아이들에게 흙 놀이, 물놀이하게 하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이 손톱 밑을 흙으로 까맣게 채우면서 그때의 공허함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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