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치료 중
가끔은 이런 날이 있다.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글도 안 써지고 나른해서 낮잠을 자려고 누워도 정신은 외려 말똥말똥 해 지고 오후 햇살이 따가워 밭에 나가긴 싫고 차를 몰고 어딘가 다녀오려 해도 귀찮은 생각이 앞서고...
오늘이, 아니 지금이 그렇다. 마치 오래전 읽은 이상의 단편 소설 ‘권태’가 생각나는 날이다.
직장과 대학에서 주로 하고 가르치던 일들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한 다음 그 결과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경영학 교수들이 뭐라고 정의하든 나는 ‘경영은 제한된 자원 배분의 최적화’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왔다. 자원이라 함은 인력, 시간, 재정 등이다. 무엇보다도 시간표 짜는 게 습관이다. 심지어 가족들과 주말 야유회를 나가도 동선에 따라 30분 단위로 시간을 배분한다.
한 때 인텔의 글로브 회장이 쓴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라는 책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지내 온 적이 있다. 시간에 관해선 거의 강박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은퇴자다. 시간 맞춰 제출해야 할 논문도, 이사회에 제출해야 할 사업 계획서도 없다. 누구도 내게 시간에 맞출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삶이 은퇴자의 자세라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의 심심함, 나른함, 무료함은 더없이 최적화된 치유 과정이다. 그런데 즐겁기보다는 힘들다.
치유 과정일까? 명현 반응인가?
지금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치유가 덜 된 게 틀림없다.
이럴 때 다른 은퇴자들은 어떤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근 한 세기 전(1935)에 버트런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에서 노동 시간을 줄여 여가를 즐길 것을 주장한다. 현명한 여가의 활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며 우매한 금욕주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과도한 노동을 강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지금의 초등) 학생 때부터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 노래를 듣고 자랐다. 중고등학교는 막스 베버의 직업 소명설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 정신에 충실한 미션 스쿨에 다녔다. 직장에 들어가서는 해외 출장 때마다 스스로 알아서 밤 비행기를 타고 낮시간을 아껴서 썼다. 길 건너 경쟁사의 불빛이 꺼지기 전에는 선뜻 사무실을 나서지 못했다.
대학에 가서는 강의가 없어도 9시 전에 연구실에 나가 앉았고 주중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한동안 어색했다.
이런 라떼 타령은 이젠 무용지물이다. 아쉽지도 않다.
그런데 습관인가 아니면 관성의 법칙인가? 선뜻 바뀌지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죽기는 싫은 데 오뉴월 하루 햇살은 왜 이다지도 기단 말인가?
이젠 우리나라 기업들도 주 4일 혹은 완전 재택근무 방식을 채용하기 시작한다.
자가 진단이지만 편집증은 분명 질병이다. 시간이 걸리겠지. 이 글을 쓰는 동안 습관의 재발인지 치유의 효험인지 몰라도 많이 편안해졌다.
자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보니 5월 하순 녹음이 푸르르다.
그나저나 너무 가문다. 텃밭에 물이나 주러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