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그거였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직이든 창업이든 변화를 향한 욕망은 크지만,
막상 생각한 만큼 준비를 마치고 그다음 단계로 옮겨 가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만큼 지금의 자리가 내 마음과 시간의 발목을 잡는다. 물론 두려움도 한몫을 차지한다.
교수로 퇴임한 선배 한 분은 은퇴와 더불어 2년제 대학 열 개를 마치겠노라는 계획을 세우고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국악기(대금)를 배우더니 원예과에 들어가 분재를 익힌다. 지금은 서양화를 배우는 중이다. 그만큼 소질도 있어 국전에 출품도 하고 세종문화회관 공연에도 참가한다.
난 은퇴하면 뭘 할까?
일하기 싫을 때, 한가할 때,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족히 수 십 번은 더 묻고 또 해 본 생각이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한 지금 딱히 몰입할 일이 없다. 주위에서는 평생을 기획 업무만 하던 사람이 자기 계획도 없냐는 핀잔에서부터 아직 은퇴한 지 얼마 안 되니 좀 더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라는 위로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다소 불편하다.
무료한 참에 서가에 꽃인 책으로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할 일이 머리를 스친다.
젊어서는 업무상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술도 좋아하지 않고 구경 다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 고작 찾아다니는 게 서점이다. 의례 커피점이 매장 안에 있어 시간 보내기는 십상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이니 직구니 해서 외국 신간을 바로바로 구할 수 있지만, 그때는 시차가 있었다. 심한 경우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어떤 책은 2~3년씩 늦게 나오곤 했다. 해서 한두 권이라도 읽어 두면 꽤 앞서가는 사람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암튼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업무상 필요한 책은 경비 처리도 되고 또 회사에 가서 읽거나 비치해서 직원들과 공유도 할 수 있으니 좋다. 하지만 심리, 종교, 뉴에이지, 여행, 역사, 우주 과학 같은 책들은 사비로 사야 했고 사도 미처 읽을 시간이 없어 이 담에 봐야지 하면서 방치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이담이 된 셈이다.
신기한 건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들이 지금은 흥미를 끈다. 무료해서일까?
더 재미있는 건 인문 사회나 자연 과학, 예술 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글들 사이에 연관성이 보이고 앞뒤로 아귀가 맞아간다는 점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짧은 공부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뭐 논문을 써서 발표할 것도, 책을 내자는 것도 아니고’하면서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더더욱 편하고 재미있다.
친구 하나는 오다가다 사 모은 피겨 조립에 푹 빠져 있고 또 다른 지인 한 명은 볼 때마다 새로운 요리를 앞에 내민다. 한식, 서양식, 중식 해가며 벌써 자격증도 몇 개 땄다. 예측해 보건대 집에 있을 땐 거의 주방에서 살지 싶다.
어쩌면 은퇴 준비는 겉으로 드러나게 해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놓치고 세상에서 지나쳐 버린 아쉬움이 나도 모르게 되살아나듯 부활하는 그곳에 내 은퇴의 할 일이 숨어 있는 듯싶다. 거기서 은퇴의 보람(?)을 찾는다면 너무 한심한 철부지일까?
삶을 한 번쯤 되짚어 보자. 잘해서 흐뭇하거나 실수해서 아쉽던 기억 말고, 그때는 꼭 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놓친 게 뭔지. 몸도 마음도 성한 지금이, 시간도 여유도 있는 오늘이 그때 그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