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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Nov 29. 2021

꿈보다 해몽

이헌령 비헌령 (耳懸鈴鼻懸鈴)

 우리말로 하면 ‘코에 걸면 코 거리요 귀에 걸면 귀걸이’쯤일 게다. 

특히 교수나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게 고사성어의 남용이다. 

문제는 그것이 부분적이요 그래서 때로 왜곡되거나 아전인수의 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논어의 첫 구절 곧,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不亦說乎)가 아닐까 싶다. 

열이면 열 모두가 그 뜻을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풀이한다. 

여기서 사단은 때 시(時)를 번역한 ‘때로’다. 때로는 때때로 즉 이따금씩을 의미한다. 연결하면 배우기는 줄곧 하고 익히기는 이따금씩으로 배운 바를 몸에 익힐 만큼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공자가 살던 시대야 배운 걸 제대로 익히려면 때로가 아니라 주야장천 연습과 반복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사서삼경을 배운다는 것은 그걸 이해하고 쓸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안 보고도 쓸 수 있을 만큼의 암기 수준이 곧 익히는 과정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도덕과 양심의 문제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옳고 그름을 배웠지만 그것이 몸에 배일만큼 충분히 익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니 알지만 행하지 않는다. 몸에 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분업화에 의해 이 현상은 더욱더 심화된 느낌이다. 고용과 실업이, 생산과 소비가 양분된 구조하에서는 만들 줄은 몰라도 쓸 줄만 알면 된다.

 이렇듯 토막 난 고사성어의 왜곡은 부족한 노력을 정당화하는 데 오용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앞뒤가 이어져야 비로소 제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내 경우 은퇴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퇴자에 맞는 인생을 정당화하려는 건지 몰라도 그런 표현이 자주 눈에 띄곤 한다. 이를테면 위인 지학과 위기 지학이 그렇다. 원문에는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이라 하여 공자가 이르기를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배웠지만,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알려지길 위하여 배운다.”는 뜻인데 내 처지에 맞게 전에는 남에게 가르치느라 공부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배운다고 풀이한다. 또한 노자도덕경의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 일익 위도 일손)도 젊어서 공부는 날마다 쌓기 위함이요 이제 나이 들어하는 공부는 덜어내기 위함일세라고 이해하니 흡족하다


내친김에 직장 때문에 부산에서 20여 년을 지내다가 은퇴하고 경기도 산기슭으로 거쳐를 옮겨 놓고는 다시 공자의 ‘인자요산 지자요수’ (仁者樂山 知者樂水)라는 말씀을 끌어 와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 하여 스스로 지혜를 찾아 공부하던 선생에서 은퇴하고 어질기를 바라는 본인의 욕심을 정당화해 본다

누가 봐도 말 그대로 이헌령 비 헌령 곧,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 거리인 셈이다. 

하지만 어쩌랴 남 피해 안 주고 자족하면 그만이지. 오늘도 은퇴한 긴 하루를 이런 글자 놀이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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