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Mortal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나이 탓인가? 은퇴한 나이니 그럴 수 있다
직업 탓인가? 대학 재직 중 유일하게 맡은 보직이 인문학 연구소장이다.
당시 죽음학(또는 사생학)이 중점 연구 과제였으니 그게 빌미일 수도 있다.
최진석의 강의를 즐겨 듣는다. 그가 장자를 풀이할 때 하던 오상아 (吾喪我)-나는 나를 장사 지낸다- 혹은 자신의 어렸을 적 죽음에 대한 두려운 기억 이야기 등등…. 때문일까?
나름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살았노라고, 해서 그럴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따금 가슴에 와닿는 책을 읽고 나서 호젓한 숲길을 홀로 산책할 때나 유쾌하게 뛰노는 손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그때였으면 할 때가 있다.
허나
건강에 이상 반응이 오거나 까닭 없이 몸이 쳐지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면 불현듯 걱정이 앞선다
아마 그 속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리라.
아!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사고인가?
결국, 죽음에 대한 담대한 생각은 전혀 죽을 것 같지 않은 생생한 상태의 객기일 뿐이란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뒤따라온다. 그리고 바로 그때 드는 생각이
‘그래 가지고 너 어떻게 죽음을 담담히 맞이 할래?’하는 자기 물음이다
비단 나만 그럴까?
아주 오래전 일이다.
이사를 가서 처음 출석한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떠오른다.
“아침에 눈 뜨면 어제 듣던 새소리에, 아! 하나님이 오늘도 안 데려가셨구나”라는 말씀에
‘얼마나 자신 있게 잘 살아왔으면 저리도 당당할까’ 속으로 빈정거린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한 달 뒤에 다시 그 노 목사가 단상에 오른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은퇴한 원로 목사로 한 달에 한 번씩만 설교를 한단다) 그리곤,
“오늘도 안 데려가셔서 아직 내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니 감사드린다.’는 설교다.
내 오해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아! 평생을 목회자로 신실하게 살았다는 분도 저러시구나’하는 안도감을 가졌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최진석 교수는 내일 죽는다면 오늘 진실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다.
옳은 소리다. 하지만 당장 내일은 아니어도 떠난 뒤를 생각하면 내 겐 두 가지 걱정이 떠 오른다.
하나는 물건이다. 책이나 옷 가지는 그렇다 손 치더라도 소위 취미 생활임 네 하며 끌어 모은 잡동사니 들이다. 말이 좋아 골동품이지 대부분은 길에 내놔도 집어가지 않을 허접쓰레기 들이다. 이걸 서둘러 덜어내야 하는 데 쉽지가 않다. 왜? 남들에겐 허접해 보여도 내겐 나름의 의미 있는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이 것들을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정확하게 그 상황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래도 정리해야 한다. 왜? 내가 없으면 의미 없는 것들이니까
둘째는 못다 한 일이다.
직업 때문인지 개인 취향인지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 브런치도 그런 연장 선상이 아닐까?)
이제는 은퇴해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도 뭔가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 의미 있고 유익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덜어 낼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책을 써야 한다는 주제넘은 의무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상당 부분 정리되는 느낌이다
‘물건’과 ‘저술’
왠지 둘 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건은 수 삼 년 내로 정리해 가자
글 쓰기는 제 스스로 삐 집고 나오기 전까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이 또한 물건처럼 그동안 어지른 것들을 정리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