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문집, 기억
“여기가 아빠가 수업 시간에 나와서 낮잠 자던 곳이고… 여기는 동아리 선후배들과 토론하던 곳이고…
난 신이 나서 설명을 해 줘도 애들은 아무 관심 없어요”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동영상 예배에 참석 중이다.
설교자가 대학 2학년 때 이민을 가서 장성한 자녀들을 데리고 고국에 와 본인이 다니던 학교 캠퍼스를 추억에 잠겨 열심히 얘기해 줘도 아이들은 아무 감흥이 없더라는 이야기다.
공감 가는 대목이다.
나 또한 지금은 장성해서 아들 딸을 둔 가장이 된 아들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했던 일들이다.
제주도에 간 길에 “여기가 아빠가 당직 서면서 외곽 근무병들을 순찰던 길이야” 혹은 모처럼 고향 근처를 지나면서 “ 저기가 아빠가 어렸을 적에 살던 곳인데 커다란 호두나무가 마당 앞에 있었지…
”하는 설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헌데 그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자식들을 데리고 유학 시절 다니던 대학엘 가서 “이 도서관은 아빠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이고, 이건 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들어가고 싶은 데 돈이 없어서 못 가본 곳이고..’ 해도 손주들은 영 시큰둥하다.
하지만 아들의 들뜬 목소리에서 그 시절, 그 장면을 떠 올린다.
난 유학을 다녀 온 적도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없다. 해서 그가 말하는 장면들이 하나도 그림으로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그때 그가 겪었을 힘겨움, 그가 느꼈을 아쉬움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기억은 추억이 될 때 감성을 자극하나 보다.
돌아보니 그렇다. 어머니가 쓰신 던 소품 하나, 아버지가 남기셨다는 물건 하나가 순식간에 나를 그 시절로 데리고 간다.
편리한 도심의 아파트 생활을 포기하고 굳이 근교의 전원주택 생활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심고 가꾼 꽃과 나무들,
투박한 솜씨로 얼기설기 이어 만든 농막,
붓글씨에 서각을 파서 내 건 정자 간판….
주말이면 이따금씩 들르지만 오다가다 본 할아버지의 이런 장면들이 나에 대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코로나와 메타버스로 급격히 다가오는 4차 산업 혁명 시대는 모든 걸 뒤집어 놓는다. 말 그대로 뉴 노멀의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두 발이 아니라 두 손을 짚고 거꾸로 서서 물구나무로 걷지 않는 다음에야 추억을 떠올리고 그로 인해 흐뭇해지는 사람의 심성은 변하지 않지 싶다.
이제는 족보도 문집도 남지 않는 세상이다…모든 게 온라인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 대한 추억은 남는다
그 추억은 미래로 흐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