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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가 죽다 Dec 19. 2022

學에서 習으로

머리에서 손까지

“당신, 해 봤어?”

현대를 창업한 고 정주영 회장의 회고록에 나온 일화로 유명해진 표현이다.

해보지도 않은 채, 경험해 보지도 않고서 책에서 읽고 남에게서 들은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


논어의 맨 앞에 나오는 말로 누구나 읊조릴 수 있는 표현이다. 

문제는 그 해석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 여기서 문제는 ‘때(時)’다


시간의 양으로 따져 볼 때 배우는 기간에 비해 익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공자가 살던 농업 사회에선 뭐든지 배우면 그걸 익힐 수 있을 때까지 해야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이 사냥하고 집을 짓고 곡식을 경작하는 일들은 모두가 숙련을 요한다. 

여자들이 길쌈을 하고 요리를 하며 집안일 하는 모두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그 복잡한 한자를 보지 않고도 쓸 때까지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동안에 내용은 자동적으로 숙지된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손발의 노동은 기계가 대신한다. 

수공업 시대의 숙련은 쓸모가 없어졌다. 

배운 만큼 익힐 필요가 사라진 셈이다. 

바로 이 학과 습의 괴리에서 온갖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중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걸 배워서 알지만 몸에 밸 때까지 습하지 않아서 되질 않는다. 


은퇴하고 나니 문화센터에 가서 배우는 게 주로 서예나 단소 혹은 스케치나 실내 작업이나 야외에서 하는 게이트 볼, 파크 골프 등이다. 하나같이 부단한 연습을 전제로 한다. 

단소가 소리를 내려면 입을 모으고 내쉬는 호흡의 절반은 악기 속으로 나머지 절반은 밖으로 뿜으란다. 

쉽지 않다.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게 붓을 곧추 세우는 중봉이라지만 여간해선 끝이 말리고 만다. 

모든 게 머리로는 이해하겠는 데 손발이 따라주지 않는다.


바야흐로 두잉의 시대다. 

나도 몇 해 전 ‘스토리 두잉(컬처 그라피, 2015)’이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지만 바야흐로 행위의 세상이다. 

인터넷에 익숙한가? 

스마트 폰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가? 

여행을 가도 참여와 경험을 앞세운다. 

모두가 책을 읽고 배워서 끝날 일이 아니다.


왜 이럴까? 

후기 산업사회는 4차, 5차를 넘어 종국에는 인류 원래의 삶의 방식으로 회기 할 거란 생각이다. 

경영학에서는 고객 경험 관리가 중요해지고 일인 다역을 의미하는 N 잡러라는 표현이 유행하지만 이 또한 수년 전에 나온 ‘폴리 매스(Poly Math)’라는 책에서 예견된 바 있다.

디지털에서 튕겨 난 시니어가 바라보는 X, Y, MZ 세대는 모두가 움직인다.

 단지 저들이 젊어서 만은 아니지 싶다.


저 물살에 뛰어드는 건 오로지 건강을 위한 운동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손에 쥔 붓을 고쳐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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