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찾다가 죽다 Dec 19. 2022

중독되지 않는 삶

가장 오래된 기억

은퇴 후 새로운 곳에 안착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이웃도 사귀고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면서 알게 된 주변 사람들과 독서 토론회를 꾸렸다. 

한 달에 한번 만나 가벼운 산책을 하면서 읽은 책에 관해 토론하는 모임이다. 

이름하여 山冊會다.

지난달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2015)’를 읽고 얘기를 나눈다. 5~70대 10여 명이 모이는 자리에 4명은 이미 연명 거부 신청을, 한 명은 사후 시신 기증을 해 두엇 단다. 두 사람은 중병과 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공유한다. 각자 나름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들이 담대하다.


나 역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서재 창가에 앉아 문득 먼 산을 바라보며 “아! 죽기 좋을 시간이다.”

하지만 곧이어 머리를 흔들며 이 또한 아직은 죽음이 멀리 있다는 생각에 드는 객기이지 싶은 고백을 한다.

모두에게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살아있음에 익숙해 서다. 오래 살수록 살아 있다는 그 자체는 습관이 된다. 습관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바야흐로 고령 사회다. 삶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죽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죽음에 관한 담론이 조성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습관은 오래되면 중독으로 변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말한다. 

함석헌 선생 또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고 국민 의식을 계몽한다. 

그런 가하면 영국 소설가 찰스 리드는 “생각이 언어를 언어가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성격을 성격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라고 쓰고 있다.

한 마디로 알아차림의 삶이다. 

매일 매시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삶은 부지불식 간에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어 끝내는 내 운명이 된다는 말이다. 환원하면 운명은 생각하는 의식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뜻일 게다. 

최진석 교수가 장자를 통해 자주 인용하는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는 오상아 또한 이에서 멀지 않다. 현재 깨어 있음을 의식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는 일상은 쉽게 습관이 되곤 한다. 

게다가 가속화하는 사회 환경은 생각의 시간을 제약하고 어렵게 생각하려 해도 피로도를 가중시킨다. 


은퇴를 하고 나면 생각할 시간이 넉넉해질까? 그렇질 못하다. 

고정적인 일의 유무를 떠나서 삶 그 자체가 이미 고속화돼 버렸기 때문이다. 

얼핏 바빠지는 생활은 다양해 보여 고착화되지 않을 성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뚜렷한 예로 약속을 잘 못하는 것과 쉽사리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기 위해 긴 문자 대화를 하지만 최종 결정은 마지막 순간으로 미뤄둔다. 

왜? 

그 사이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에서다. 

24시간 연결된 SNS 때문이다. 

여행이건 볼 일이건 선뜻 집을 나서지 못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은퇴한 입장에서 시간적 여유도 경제력도, 체력도 아직은 가능하다. 하지만 막상 나서려니 귀찮기도 하고 망설여진다. 현대인은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도 안 가는 세대로 퇴화하고 있다. 

유독 시니어 계층이 두드러 진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에 중독된 탓이다. 중독에 저항하려면 끊임없이 변화에 매달려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死色이 되도록 思索해야 하는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 學에서 習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