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따로 생각 따로
글을 올리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애초 제목은 ‘은퇴하니 어때요?‘라고 해 놓고 글은 국내와 다국적 기업 간의 비교 얘기로 흘러버렸다. 밑에 적어 놓은 양자택일의 강박에 강박적으로 떠밀린 건가 하지만 아무래도 노화지 싶다.
하긴 요즘엔 책을 읽어도 어느 순간 눈만 글씨를 따라갈 뿐 생각은 엄한 데로 흘러가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멀티 한 습관이라는 둥 책을 읽으면 걷잡을 수 없게 솟구치는 아이디어 때문이라는 둥 스스로에게 둘러대지만 결국은 집중력 저하 곧, 노화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따로 논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양의 정자를 둘러볼 요량으로 여행을 떠났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어쩜 그렇게 지형지물에 맞도록 지어졌는지 감탄을 하며 바라보다 거연정에 이르렀다.
바위와 바위 사이가 불과 오륙십 센티미터? 내 보폭이 칠십이니, 마음 놓고 폴짝 뛰다가 바위 사이로 빠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돌이켜도 어이가 없다. 의사 말로는 골반(뼈)이 굳어져 보폭이 줄었다는 설명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번쩍 들어 옮겼던 대리석이 꿈쩍을 안으니 하기사...
왜 몸 따라서 마음은 늙지 않는 걸까?
살면서 누리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들이나 며느리와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는 대학에서 오랫동안 젊은 학생들과 생활해서 그렇다고 하고 또 누구는 나이 든 사람들의 착각이니 오해 말라고 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더불어 전개되는 메타버스, 그 세상에서 펼쳐질 제패토와 같은 아바타들의 생활, 원본과 소유권을 입증할 NFT와 같은 블록체인의 일상화.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확산 그로 인한 생산성의 폭발과 상대적인 인구감소가 가져올 작업 시간의 유연성과 기본 소득에 관한 논의의 필연성 등은 내 보기에도 명 확관 하하다.
나이 들수록 경직되는 이유는 육체적으로는 탈수 현상이요 정신적으로는 지식과 경험의 유효 기간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앞서 개울에 빠진 이유는 신체의 탈수로 몸이 뻣뻣해졌기 때문이다. 고집에 세지는 건 내 생각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생 쌓은 지식과 경험이 폐기 처분당하는 건 참기 힘든 노릇이다.
하지만 어쩌랴! 샤무엘 아브스만이 쓴 ’ 지식의 반감기‘라는 책에 보면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를 예로 들어 우리가 아는 지식의 수명을 지적하고 있다. 하기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4차 산업혁명의 결과물들은 학창 시절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문명 들이다. 옥스퍼드 대학이 조사해서 발표했다는 ’ 고용의 미래‘보고서를 보면 향후 20년 내에 현존하는 직업의 47%, 거의 절반이 사라질 거라고 한다.
젊어서는 용솟음치는 혈기로 육신을 제어하기가 버거웠다. 나이가 드니 생각들이 마치 연기처럼 피어올라 가슴속에 담아두기가 힘들다. 평생을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이 날 가만두질 않는다.
그러나 분명코 세상이 변했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해서 드러내면 잔소리요 노파심이 된다. 꼰대라는 핀잔을 벗기 어렵다. 어찌할 거나?
이대로 용도 폐기당하고 쥐 죽은 듯 살아야 하나?
그러기에는 고령화 사회로 남은 시간이 너무 길다.
세대 간, 이념 간, 계층 간 벌어질 대로 벌어진 이 간극을 어찌 메울까?
어찌 건널까?
나름 양자 부정(neither nor)이 아닌 양자 긍정(either or)의 자세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겠다.
해답을 찾습니다.
아마도 은퇴 후 주력해야 할 최대 과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