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해부학 13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이 마주 보이는 오래된 온천장에 여장을 푼다.
온천을 즐긴다는 개인적 기호도 있지만 기실, 같은 출장이라도 은퇴 후는 급이 다르다. 아니 알아서 다르게 처신해야 한다. 손바닥만 한 벤처 기업을 자문하는 입장에서 다국적 기업의 CEO 경비를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전 6시, 처서가 지나 추분이 코앞인데도 아직 밖은 훤하다. 근처 복국집은 여덟 시나 돼야 아침 식사가 가능하니 방 안에서 뒹군다. 예나 지금이나 호텔 방의 조명은 책 읽기엔 너무 어둡다.
못 참고 길을 나선다.
아직 출근하는 인파도 드문 시간이다. 생각은 예전 젊어서의 출장 기억으로 향한다. 홍콩도 도쿄도 뉴욕도 이 맘 때쯤이면 한 손엔 종이컵을 든 종종걸음의 젊은이들로 즐비하다.
새벽이면 눈이 떠지는 버릇은 오래된 습관이다.
아마도 군대 훈련 시절에 비롯됐지 싶다. 장교인지라 5개월의 훈련 기간 내내 새벽에 기상하고 요즘 같으면 초 저녁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제대 후 출근하느라 일찍 일어나다 보니 어느새 몸에 밴듯하다.
해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제일 먼저 연구실에 나와 앉는다. 드넓은 학교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아도 아직 1교시 등교 학생들이 보이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다 은퇴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가진 게 시간이요 남는 게 시간인 생활이다. 늦게 일어나야 하루가 짧다. 하나 그게 쉽지 않다. 평소에 나쁜 습관은 고치기 어려워도 좋은 습관은 쉽게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를테면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지기는 힘들어도 부지런한 사람이 게을러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이다. 모든 습관은 비 가역적이다.
비단 습관뿐만이 아니다. 사고도 마찬가지다. 이제 곧 추석 명절이다. 정부나 기업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연휴 늘리기에 들어간다. 연가를 줄이고 소비를 진작시키려는 노력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계와 로봇에 의한 생산성이 잉여 노동을 창출한 것이다.
이제 머잖아 주 4일제가 현실이 될 판이다. 논란 중이지만 기본 소득제도 확산될 것이고 긱경제나 N잡러는 더더욱 일반화될 판이다. 이 모든 변화들이 머리로는 이해되는 데 몸과 생각이 따라주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군사 정권 시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조심하던 자율 규제만큼이나 주중에 쉬는 데 대한, 부지런하지 못한 데 대한 죄의식(?)이 남아 있다. 젊은이 들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렇다. 해서 입으로는 게을러야 한다지만 습관은 전혀 그럴 맘이 없는 듯하다.
방법은 하나다. 생산성의 목표나 대상을 바꾸는 일이다. 산업 생산성에서 여가 생산성으로, 재화 생산성에서 건강이나 행복 생산성으로… 하지만 그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바삐 살면서 봉사는 나중에 은퇴 후에 하겠다고 핑계했지만 정작 은퇴하고 나니 어찌 봉사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심정과도 같다.
좋든 싫든 모든 습관은 바꾸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