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해부학 13
40대 초반에 임사 체험을 했다는 밤나무 골의 김 선생,
3차 항암치료 끝에 요양 병원을 뛰쳐나왔다는 홍여사,
돌아가신 모친과 자신의 시신을 사후 병원에 기증 서약했다는 80의 월남전 참전 용사,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 죽으러 들어왔는 데 아직도 살아있다는 마당발 찰스…
은퇴 후 전원주택에 사는 내 주변에는 서울 근교라서 그런지 요양 병원이 유독 많다. (어쩌면 고령사회라서 우리 동네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해서 살면서 조금씩 안면을 넓혀가다 보니 사연도 많다. 아니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낸 듯싶지만 죽음을 안고 산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삶에 익숙해서다. 더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만큼 삶에 익숙하다.
그만큼 죽음이 낯설다.
삶은 습관이 되고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어떻게 살아야 중독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이 말은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일 게다.
교환 교수로 중국 심천대학교 교수 기숙사에 머물 때였다. 여느 날처럼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나선다.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교정에 띄엄띄엄 켜진 조명만이 앞 길을 밝힌다. 그렇게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저만치 학교 남문이 보일 즈음
갑자기
‘아! 세상을 떠날 때 이렇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친다.
모두가 잠든 밤 학교 안에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나뿐이다.
‘이렇게 홀로 떠나겠구나!’ 싶은 것이다.
무섭다거나 서글프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라도 한번 더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처음으로 삶이, 살아있음이 낯설게 다가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낯설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장자는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고,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또 로마의 개선장군은 메멘토 모리(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를 상기했는가 보다.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 둔 사람들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삶은 삶의 중독성을 일깨우는 해독제의 역할을 한다.
작가 구본형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외친 것도, 가까운 일본이나 먼 유럽의 나라들이 묘지를 동네 한가운데 두고 사는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